항목 ID | GC024009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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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易東遺墟碑 |
영어공식명칭 | Stele of U Tak |
영어음역 | Yeokdong Yuheob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1227-2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진영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3년 8월 31일 - 역동유허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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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역동유허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
성격 | 유허비 |
건립시기/일시 | 조선시대 |
관련인물 | 우탁(禹倬, 1236~1342) |
재질 | 석재 |
높이 | 190㎝ |
너비 | 77㎝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1227-2 |
소유자 | 우성구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 우탁의 유허비.
[개설]
우탁(禹倬, 1263~1342)은 진사 우천규(禹千珪)의 아들로, 본관은 단양, 자는 천장(天章)·탁보(卓甫), 호는 역동(易東)이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역학(易學) 복서(卜筮)에 통달하였으며 처음으로 정주학(程朱學)을 연구, 전수하였다고 한다. 1308년(충선왕 1)에 왕이 덕이 없음을 간하다가 예안으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이 여러 차례 부르자 다시 관로에 나아가 벼슬이 성균관좨주[祭酒]에 이르렀다. 문예에도 조예가 깊어 늙어감을 한탄하며 지은 「탄로가(歎老歌)」는 시조 문학의 효시이면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건립경위]
1789년(정조 13)에 지역 사람들과 후손들이 유허비를 세웠으며, 그 후 6년 뒤에 안동부 북쪽의 정정산(鼎井山)에 묻혀 있던 묘갈(墓碣)이 발견되어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의 비는 1880년(고종 17) 4월에 세우고 음기(陰記)를 새긴 것인데, 1789년에 세운 비와의 관계는 알 수 없다. 이 비의 끝 부분을 보면 후학 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 이우량(李宇亮)이 비문을 지은 것을 알 수 있고, 음기는 경상도도사를 지낸 김흥락(金興洛)이 쓴 것으로 적혀 있다. 또 끝에 1789년 당시에 비를 세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옛 비를 새 비로 대체하였거나 혹은 새로 새겨서 옮긴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위치]
역동유허비는 원래 우탁의 옛 집터를 기리기 위하여 예안면 의양동에 세워졌다. 이후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6년 4월에 댐 가장자리로 옮겼다가 1998년 다시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형태]
정면 1칸 측면 각 1칸 맞배지붕의 비각(碑閣)에 보존되어 있는데,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맨 위에 머릿돌을 얹어놓은 모습이다. 비의 폭은 77㎝이고, 높이는 190㎝이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 ‘고려제주역동우탁선생유허(高麗祭酒易東禹倬先生遺墟)’라고 되어 있다. 음기를 통해 ‘삼리(三里)’라는 마을 이름이 우탁 자신의 학덕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황(李滉)이 우탁을 기리기 위해 예안에 역동서원을 세웠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현황]
역동유허비는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2011년 현재 단양우씨(丹陽禹氏) 후손 우성구(禹聲九)가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황이 우탁의 서원을 세운 사실과 전후 두 차례에 걸쳐서 우탁의 유허비가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