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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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葛庵集 |
영어음역 | Garamjip |
영어의미역 | Garam Garland |
이칭/별칭 | 『갈암선생문집(葛庵先生文集)』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단행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황만기 |
성격 | 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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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 | 이현일(李玄逸, 1627~1704) |
저자 | 이현일(李玄逸, 1627~1704) |
간행연도/일시 | 1909년 |
권수 | 40권 |
책수 | 21책 |
사용활자 | 목판본 |
가로 | 16.6㎝ |
세로 | 20.6㎝ |
표제 | 葛庵先生文集 |
소장처 | 안동대학교 도서관 |
소장처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 388[경동로 1375] |
[정의]
1909년에 간행된 경상북도 안동 출신 이현일의 시문집.
[개설]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아버지는 참봉 이시명(李時明)이고, 이휘일(李彙逸)이 형이다. 어머니는 안동장씨로 장흥효(張興孝)의 딸이다.
[편찬/발간경위]
『갈암집(葛庵集)』은 원래 숙종 연간에 이현일의 아들 이재(李栽)가 편집하고, 이재를 비롯하여 문인 권두경(權斗經)·이광정(李光庭) 등 6인이 초고(草稿)와 재교(再校), 대교(對校), 교(校) 등 네 차례의 교정을 거쳐 정고본(定稿本)을 완료하였다. 이후 부록 5권 3책도 이재(李栽)가 아울러 편찬하여 간행을 시도하였으나 당시 이현일이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죄적(罪籍)에 올라 있어 간행할 수 없었다. 그 뒤 1811년(순조 11) 별집 6권 3책을 추가하여 21책으로 간행하였으나 역시 관금(官禁)으로 문집은 회수되고 책판은 소각당하였으며 간행에 참여한 후손 6인이 유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뒤 철종과 고종 연간에 이현일의 신원, 추탈 과정에서 간행을 시도하다 1909년 이현일의 신원과 아울러 중간되었다.
[서지적 상황]
본서의 저본은 1909년 중간된 안동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이다.
[형태]
40권(원집 29권, 별집 6권, 부록 5권) 21책의 목판본으로 표제는 갈암선생문집(葛庵先生文集)이다. 행자(行字)는 10행 20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기는 가로 16.6㎝, 세로 20.6㎝이다. 어미는 상하이엽화문어미(上下二葉花紋魚尾)이다.
[구성/내용]
시(詩)는 지구(知舊), 문인, 자제들과 창수(唱酬)가 가장 많고 고적, 기행, 영회(詠懷) 등이 그 다음인데, 그 중에는 영사시(詠史詩)나 도학(道學)에 관한 시가 많다. 만년에 홍원(洪原)·종성·광양(光陽) 등 유배지에서의 작품은 유배문학 연구의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영화왕(詠花王)」은 9세 때의 소작으로 경인구(警人句)이고, 「영창전매(詠窓前梅)」는 10세 때 소작으로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포위 소식을 듣고 흥분에 겨워 지은 시이다.
「독징비록유감(讀懲毖錄有感)」은 1649년(인조 27)인 23세 때 류성룡(柳成龍)의 『징비록』을 읽고는, 청에 대한 복수설치(復讐雪恥)와 요동 회복의 뜻을 나타낸 시이다. 「병중서회(病中書懷)」는 78세 때 지은 절필시(絶筆詩)로 “평생에 한 일이 무엇이더뇨, 하늘에 부끄럽지 않으려 했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이현일의 수양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소와 그에 준하는 차(箚), 헌의(獻議) 등 138편이나 있는데 정치, 국방, 경제, 외교, 예제 등 정책 전반에 걸친 건의이다.
「의논대왕대비복제소(擬論大王大妃服制疏)」는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에 관한 송시열의 예설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영남 사림을 대표해서 지은 것이다. 「경연강의(經筵講義)」는 이현일이 경연에서 경사(經史)와 치도(治道)를 강론한 내용을 집록한 것으로 당시 경연 운영의 실상과 이현일의 학문, 정치관을 살필 수 있다.
『갈암집(葛庵集)』에 특히 많은 것이 서(書)로서 150인 가량의 사우(師友), 문인, 자손들과 주고받은 것으로 총 360여 편이나 되는데 시사(時事), 경학(經學), 성리학, 예학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 잡저는 서와 함께 이현일의 학문, 특히 성리학적 입장을 천명하는 대표 논리이다.
「수주관규록(愁洲管窺錄)」은 69세 때 유배지인 종성에서 논술한 것으로 장현광, 조호익, 류성룡, 조식 등 선배 학자 6인의 성리설에 의심스러운 곳을 지적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하였고, 신안진씨(新安陳氏)·경재호씨(敬齋胡氏) 등 중국의 학자 6인에 대해서도 주자의 입장과의 차이를 분석하여 비판하였는데 이는 매우 진취적인 학문의 자세로 평가된다.
부록에 수록된 「유사(遺事)」와 「취정록(就正錄)」은 행장, 묘갈명 등과 함께 이현일의 전기 자료이다. 이중 특히 「취정록」은 문인 신익황이 저술한 문학기(聞學記)로서 당초 이이(李珥)의 성리설을 수용하던 신익황이 이현일과의 6년간에 걸친 논변 끝에 승복하고 문인이 된 사실을 적은 것이다.
[의의와 평가]
『갈암집』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한 시대 한 학파를 대표하던 학자의 문집으로서 손색이 없다. 그런데도 저자인 이현일의 학문이나 사상, 그리고 경세학, 예학, 경학 및 정치적 위치 등에 대해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실정이고 오직 성리학에 대해서만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한국철학사(韓國哲學史)』 등에 소개되어 있으며 몇 편의 논문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