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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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栽 |
영어음역 | Yi Jae |
이칭/별칭 | 유재(幼材),밀암(密庵),금수병수(錦水病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배종석 |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유생.
[가계]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密庵)·금수병수(錦水病叟). 할아버지는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할머니는 『음식지미방(飮食知味方)』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정부인(貞夫人) 안동장씨(安東張氏)로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딸, 아버지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어머니는 무안박씨(務安朴氏)로 경력 박늑(朴玏)의 딸이다. 뒤에 백부 이휘일(李徽逸)에게 입양되었다.
[활동사항]
이재는 7세 때부터 백부 이휘일과 숙부 이숭일(李嵩逸)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휘일의 훈도를 많이 받았는데 그 영향으로 16세 되던 해 이휘일이 죽자 한 때 낙담하여 은둔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이현일로부터 “군자는 도가 행해지면 세상에 나가고, 도가 없어지면 은둔할 뿐이다.”라는 충고를 듣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전한다.
26세 되던 해인 1682년(숙종 18) 가을 아버지의 명으로 향시에 응시하였다. 이는 이재가 치른 처음이자 마지막 과거였는데, 합격 여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33세 되던 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벼슬에 나간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가서 1694년 고향에 돌아올 때까지 부친의 벼슬을 시종 들었는데 당시 일처리가 야무지다는 평을 들었다. 마침 1693년 겨울에 정시(庭試)가 있어 대신들이 선발하려 하자 “아버지가 높은 관직을 맡고 있는데, 내가 연줄로 과거에 합격한다면 누가 될 뿐이다. 더구나 선비가 벼슬길에 나가는 정당한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며 사양하였다.
낙향한 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 정권이 실각하자 아버지 이현일 역시 당쟁에 휘말려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로 모두 7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는데, 이재도 이 기간 동안 대부분 아버지를 동행하며 곁에서 극진히 모셨다. 특히 이현일이 유배 기간 동안 국문을 받기 위하여 한양으로 소환되어 며칠 옥에 갇히자 걱정으로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고 한다. 1700년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나자 동행하여 안동의 금소(琴韶, 현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로 옮겨 살았다.
49세에서 52세에 이르는 시기에 처 박씨(朴氏)를 비롯하여 아들 넷 중 셋과 딸 둘을 역병으로 연달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유일하게 남은 3남 이인환(李寅煥)에게 보낸 편지에 “어느 집안의 재앙이 이토록 있겠느냐!”라고 애통해하면서 “이제 내가 의탁할 곳은 너뿐이니, 너라도 자중자애하여 처신하라.”라는 당부를 담은 내용이 있어 당시의 통절한 심정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 영남 남인 일부에서 호응하는 움직임이 있자 당시 안무사로 파견된 박사수(朴師洙)가 글을 보내 함께 난의 진압을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병석에 있던 이재는 병을 무릅쓰고 들것에 의지하여 읍내로 들어가 박사수와 함께 의병 일을 의논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이 때 지인인 권구(權榘)가 반란군의 취조 명단에 들어있었던 관계로 한양으로 잡혀가 의금부에 갇힌 일이 있었다.
당시 임금이 권구를 친국하며 교유한 사람의 이름을 대라고 하자 권구는 이재를 입에 올렸으나 임금은 “내가 이미 이재의 명망을 듣고 파격적으로 관직을 제수한 일도 있는데, 네가 그와 교유하였다고 하니 단정한 사람들만을 사귄 것을 알겠다. 그러니 필시 역적과는 내통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며 극적으로 풀어주었다. 같은 해 4월 등급을 초월해서 장악원주부 벼슬이 내려졌으나 이미 병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데다 사사로운 의리 때문에 처신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재차 명이 있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학문과 사상]
이재는 이현일·이휘일·이숭일 등에게서 수학한 퇴계 학봉계 학파의 주요 전수자로서 김태중(金台重)·김세흠(金世欽)·김창석(金昌錫)·김세호(金世鎬)·신익황(申益愰)·이만부(李萬敷)·권두경(權斗經) 등 당시 영남 일대의 여러 학자들과 학문적인 교유를 하면서 주리론(主理論)적 입장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여 영남학파를 이끌어갔다.
후진 양성에도 힘써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는데 ‘소퇴계(小退溪)’로 불리며 영남학파의 중심으로 활약했던 외손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과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이 대표적이다. 또 1704년(숙종 30) 정시한(丁時翰)을 방문하여 이기(理氣), 사칠(四七), 건순오상(健順五常),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등에 대해 토론하고 동의를 얻었다.
이재의 이기설(理氣說)은 태극(太極)에 동정(動靜)이 있어서 음양(陰陽)이 나뉘고 오행(五行)이 갖추어지며, 그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그 빼어나고 영묘한 것을 얻었다고 보는 주리론적 입장을 취한다. 이 때문에 기(氣)의 작용을 기다리지 않고 이(理)만으로도 일용동정(日用動靜)의 체용(體用)이 될 만한 묘법을 갖추었다고 주장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이와 기란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서로 떨어지지도 않고 서로 섞이지도 않는 관계이므로 이것을 나누어 둘이 되게 할 수도 없고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는 『밀암집(密庵集)』이 있다. 주요 저술을 보면, 1713년(숙종 39) 『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와 이현일이 1689년(숙종 15)부터 1694년(숙종 20) 실각할 때까지 올린 상소문 등에 대해 임금이 내린 비답(批答) 등을 모아서『성유록(聖諭錄)』을 완성하였다. 1723년(경종 3) 이휘일과 이현일의 유작인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완성시켰다. 만년에는 공자의 제자인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의 전기를 편집하여『안증전서(顔曾全書)』를 편찬하였다. 기타 『주전집람(朱全集覽)』 4책, 『주어요략(朱語要略)』 2책, 『창구객일록(蒼狗客日錄)』 1책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무릉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