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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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象靖 |
영어음역 | Yi Sangjeong |
이칭/별칭 | 경문(景文),대산(大山),문경공(文敬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배종석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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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
성별 | 남 |
생년 | 1711년 |
몰년 | 1781년 |
본관 | 한산 |
대표관직 | 강령현감 |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고조부는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증조부는 이효제(李孝濟), 할아버지는 이석관(李碩觀), 아버지는 이태화(李泰和), 어머니는 재령이씨(載寧李氏)로 밀암(密庵) 이재(李栽)의 딸이다. 고조부 이홍조가 광해군 때 외조부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있는 안동으로 피신해 오면서 그 후손들이 안동에 세거하게 되었다.
[활동사항]
이상정은 1711년 1월 29일 안동부(安東府) 일직현(一直縣) 소호리(蘇湖里, 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서 태어났다. 남달리 총명해서 5세 때 글자를 배웠는데 이때 벌써 편방(偏傍)과 점획(點劃)을 다 알고 구별했다고 한다. 6세 때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그 슬퍼하는 모습이 마치 어른 같았다고 한다.
윤리에 독실하여 자제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혹시라도 어기는 일이 없었고, 동년배들에 대해서도 낯빛을 바꾸거나 모진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또 율려(律呂: 음악), 역법(曆法), 산수(算數)에 모두 통달했으며, 선기옥형(璇璣玉衡: 혼천의), 심의(深衣), 상복(喪服) 등의 제도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 않고도 바로 손 가는 대로 만들어 내어 늘 스승인 이재의 칭찬을 받았다.
1735년(영조 11)에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전적, 병조정랑, 사간원정언, 사헌부감찰, 병조참지, 예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외관직으로는 연일현감, 강령현감(康翎縣監) 등을 지냈다. 이상정의 치적으로는 1753년(영조 29) 연일현감 재임시, 연일은 풍속이 교화되지 않아 현민이 소송을 일삼아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이었으나 이상정의 노력으로 한 때라도 아이와 여자들이 굶주리지 않게 되었다.
또 연일현감 부임 당시 연일은 날이 가물어 민심이 어지러웠으나 부임하자마자 비가 내려 현민들이 그 비를 사군우(使君雨)라 불렀다 한다. 1780년(정조 4) 병조의 낭관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자 다시 예조참의에 제수되었고, 이듬해에는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이와 병을 이유로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1781년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이상정은 퇴계학맥의 중요한 계승자인 이재(李栽)의 외손으로 일찍부터 그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여 이황(李滉)-이현일(李玄逸)-이재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남한조(南漢朝), 김종덕(金宗德), 류장원(柳長源) 등에게 전수하였다. 이재의 문하에서는 김익한(金瀷漢), 권정택(權正宅), 김낙행(金樂行) 등과 교유하였다.
20대부터 고향의 문중 부로들이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세운 대산서당(大山書堂)에서 학문에 잠심하여 후학을 가르쳤다. 가난하여 나물밥 끼니조차 잇기 힘들었으나 오롯이 학문과 교육에 힘써서 때론 달 밝은 밤에 혼자 못가에 앉아 명상을 즐기고 때로 심신이 피곤하면 정관대를 거닐면서 성령(性靈)을 도야하였다. 당시 이상정은 30세가 못 되었으나 그 명성이 널리 퍼져 원근에서 배움을 청하기 위하여 찾아오는 선비들이 날로 늘어났다.
이상정은 학문함에 있어 공부를 정밀하게 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평소 새벽에 일어나 머리 빗고 세수하고 먼저 가묘(家廟)에 참배하고 나서 책상 앞에 앉았다. 독서는 공맹정주(孔孟程朱)의 글을 주로 하였고 때론 밤 새워 사색하고 혹은 여러 날을 침잠하여 반드시 깨우친 뒤에야 그쳤으며 마음에 체득한 바는 반드시 몸으로 행하였다. 남의 허물은 못 들은 체 했고 남의 착한 행실을 들으면 반드시 칭찬하였다.
벼슬길에서 물러나와 다시 서재의 문을 열자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선비들이 몰려들었다. 제자를 가르침에 있어서 그 자질에 따라 함양했으며 심술(心術)을 밝혀 기질을 변화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당시 영남의 선비로 언행이 겸손하고 공경스러우며 눈매가 단정한 이는 묻지 않아도 대산 문인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상정은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 주리설(主理說)을 확립하였다. 이(理)는 무력한 정지체가 아니요, 스스로 능히 발하여 운용할 수 있는 활물(活物)이라고 하여 이(理)의 운동성을 인정하였다.
즉, 이는 비록 기(氣)를 타고 동정(動靜)하나 그 발휘운용(發揮運用)하는 묘가 있어 하지 않음으로서 행하니 진실로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주재하지 않더라도 주재하는 바가 있으니 아주 주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 기는 이(理)가 동정할 수 있도록 하는 바탕[資]이 된다고 보았다. 이상정의 이기설은 이(理)의 능동성을 부정한 율곡의 주기설(主氣說)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갖는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대산집(大山集)』이 있다. 저술로 『이기휘편(理氣彙編)』, 『사칠설(四七說)』, 『제양록(制養錄)』,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 등이 있으며, 25세 때의 시권(試券)도 전해진다. 문집은 1802년(순조 2) 간행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학가산(鶴駕山)의 사향(巳向) 언덕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16년(순조 16) 이조참판에, 1882년(고종 19)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910년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