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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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川李氏 |
영어의미역 | Yeongcheon Yi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집필자 | 김복영 |
세거지 |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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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
입향시기/연도 | 고려 말 |
성씨시조 | 이문한(李文漢) |
입향시조 | 이헌(李軒) |
[정의]
이문한을 시조로 하고 이헌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안동시 세거 성씨.
[개설]
안동의 영천이씨는 입향조 이헌(李軒)이 군기시소윤을 지내다가 고려 말에 영천에서 안동으로 이거한 후 후손들이 도산면 일대에 세거하면서 형성된 가문이다.
[연원]
영천이씨는 고려 때 평장사를 지낸 시조 이문한(李文漢)의 후대에 내려와서 이약(李約)을 파조로 하는 서승공파(署丞公派), 이대영(李大榮)을 파조로 하는 영양군파(永陽君派), 이중영(仲榮)을 파조로 하는 울산공파(蔚山公派)로 분파되는데 안동의 영천이씨는 영양군파 이대영의 5세손 이헌의 후손들이다.
[입향경위]
고려 말 군기시소윤의 벼슬을 지내던 이헌이 국운이 기울어갈 때 영천에서 산수가 아름다운 예안으로 이거하여 정착함으로써 예안은 영천이씨 소윤공파(少尹公派)의 입향지가 되고 이헌이 파조가 되었다. 현재의 예안면 분천리에 자리잡은 영천이씨는 대대로 벼슬길이 끊이지 않아 이헌의 아들 이파(李坡)와 이오(李塢)는 각각 의흥현감과 예문관직제학을 지냈고, 손자 이효손(李孝孫)은 통례문봉례, 증손 이흠(李欽)은 인제현감을 지냈다.
이헌의 현손이며 이흠의 아들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는 1498년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부사,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 등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어부가(漁夫歌)」, 「농암가(聾巖歌)」, 「효빈가(效嚬歌)」 등 불후의 한글 시가를 남긴 가사문학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이현보의 동생 이현우(李賢佑)는 분천에서 낙동강 상류인 사천으로 분가하였으며, 아들 이충량(李忠樑)은 반남박씨(潘南朴氏)인 박승장의 사위가 되어 영주 구룡동(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로 이거하였다. 이충량의 아들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로 『주역질의(周易質疑)』, 『사서질의(四書質疑)』,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 등의 저서를 남긴 조선 중기의 유생이다.
이현보는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이석량(李碩樑)은 일찍 죽고, 차자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은 평릉찰방, 3자 이희량(李希樑)은 봉화현감을 지냈고, 4자 이중량(李仲樑)은 문과에 올라 예조참의가 되었으며, 5자 이계량(李季樑)은 현감을 지냈으며, 6자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은 사마시를 거쳐 왕자사부가 되었으며, 7자 이윤량(李閏樑)은 내의원판사, 8자 이연량(李衍樑)은 사복시정을 지내는 등 예안에 정착한 영천이씨는 이현보 이후 안동 지방의 이름 있는 가문으로 발전하였다.
[현황]
영천이씨는 안동댐 건설로 세거지가 수몰되면서 후손들은 흩어지고 종택을 비롯한 유적들도 훼손되거나 여러 곳으로 분산, 이건되어 옛 모습을 잃게 되었다. 현재 도산면 원천리에 집성촌이 있다.
[관련유적]
안동댐 건설로 입향 세거지 분천리가 모두 수몰되어 이현보를 제향한 분강서원(汾江書院)과 간재 종택(艮齋宗宅)의 별당인 긍구당(肯構堂)은 도산면 운곡리로 이건하였고 이현보가 부모를 위하여 세웠다는 애일당(愛日堂)과 낙동강가의 원래 애일당이 있던 자리를 기념하여 새긴 암각서(巖刻書)는 분천리 뒷산 중턱으로 옮겨놓았다. 예안면 신남리 정자골에 농암 이현보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현재 이들 문화재들은 다시 도산면 가송리로 새 터를 마련하여 옮기는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