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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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州鄭氏 |
영어의미역 | Cheongju Jeo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집필자 | 김복영 |
세거지 | 안동시 와룡면 태리|안동시 북후면 도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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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안동시 와룡면 태리 |안동시 북후면 도진리 |
입향시기/연도 | 14세기 말 |
성씨시조 | 정극경(鄭克卿) |
입향시조 | 정침(鄭賝) |
[정의]
정극경을 시조로 하고 정침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안동시 세거 성씨.
[개설]
안동의 청주정씨는 청주정씨의 시조 정극경(鄭克卿)의 8세손 정침(鄭賝)이 조선 초 안동으로 이거하여 정착하고 후손들이 와룡 마암, 북후 도진 등지에 세거하면서 형성된 가문이다.
[연원]
청주정씨는 고려 의종 때 중랑장을 지낸 시조 정극경의 5세손 정해(鄭瑎)가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도첨의찬성사에 올랐으며 정해의 아들 정책이 통헌대부 판도판서에 오르고 청하군(淸河君, 청주의 별호)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정극경을 시조로 하고 청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입향경위]
정책은 상락군(上洛君) 김방경(金方慶)의 아들 김순(金恂)의 사위이다. 정책의 손자 정침은 1343년 문과에 급제하고 공민왕 때 소부정윤을 지냈는데 고려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진외가를 따라 안동으로 내려와서 현재의 와룡면 지내리 모산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정침의 손자 정약(鄭若)이 태종 때 형조좌랑을 지냈고, 정약의 아들 정보문(鄭普文)은 진성이씨(眞城李氏)인 선산부사 이정(李禎)의 사위가 되었다.
정보문의 맏아들 정인로(鄭仁老)는 용양위사직을 지냈고 정인로의 증손 정두(鄭斗)가 모산에서 마암촌(말바우)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정보문의 셋째 아들 정원로(鄭元老)는 장기현감을 지냈고 정원로의 증손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은 임진왜란을 슬기롭게 극복한 명신으로 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오르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정두의 아들 지헌(芝軒) 정사성(鄭士誠, 1545~1607)은 진사에 오르고 현감을 지냈으며 정사성의 아우 매창(梅窓) 정사신(鄭士信, 1558~1619)은 문과에 급제하여 판결사를 지냈고, 1610년(광해군 2) 8월 6일부터 180일간 하정부사로 북경을 다녀오면서 보고 느낀 것을 적은 기행문 『조천록(朝天錄)』을 남겼다.
[현황]
안동의 청주정씨는 와룡면 태리와 북후면 도진리에 집성촌이 있다. 정두의 후손들은 와룡면 태리 마암촌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 살고 있으며, 청주정씨 마을로 지헌 정사성의 둘째 아들 송오(松塢) 정전(鄭佺, 1569~1639)의 후손들은 북후면 도진리에 거주하고 있다. 또 서후면 광평리에는 정사신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정탁의 후손들은 예천 고평리와 삼강리에 세거하고 있다.
[관련유적]
와룡면 태2리 속칭 말바우에 죽헌 종택(竹軒宗宅)과 사당이 있고, 북후면 도진리에 몇 채의 고가가 있다. 예천군 호명읍 고평리에 정탁의 사당인 정충사(旌忠祠)와 정탁의 영정 및 유품을 보관한 유물각, 정탁을 제향한 도정서원(道正書院)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