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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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士信 |
영어음역 | Jeong Sasin |
이칭/별칭 | 자부(子孚),매창(梅窓),신곡(神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태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만기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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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태리 |
성별 | 남 |
생년 | 1558년(명종 13) |
몰년 | 1619년(광해군 11) |
본관 | 청주 |
대표관직 | 밀양부사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부(子孚), 호는 매창(梅窓)·신곡(神谷). 증조부는 의영고직장 정윤소(鄭允昭), 할아버지는 진사 정언보(鄭彦輔), 아버지는 정두(鄭枓),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사직 권식(權軾)의 딸이다. 형이 양구현감 정사성(鄭士誠)이다.
[활동사항]
정사신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태리에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형 정사성에게 수학하였고, 17세때 백담 구봉령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저작, 박사, 감찰, 정언, 예안현감, 병조정랑, 부수찬겸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 전적, 예조정랑, 수찬 등을 지냈으며 1590년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지 않고 뒤쳐졌다 하여 삭직당하였다.
그 뒤 강원도 강릉 지방에서 이민환과 함께 의병을 모아 왜적을 무찌른 공으로 1594년 경상도도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선산부사를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08년(선조 41)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610년 동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장례원판결사, 밀양부사겸경상도중도방어사를 역임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는 『매창집(梅窓集)』 5권 3책이 있다. 문집 중 「기자조주수봉변(箕子朝周受封辨)」은 주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분봉한 사실이 없으며, 다만 사마천이 야사(野史)를 『사기(史記)』에 기록함으로써 기자분봉설이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경사(經史)를 인용하여 논변한 것이다. 「조완벽전(趙完璧傳)」은 조완벽이 정유재란 때 왜적에 붙들려 일본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그 주인을 따라 안남(安南, 현 베트남)에 행상(行商)하고 돌아온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고문진보전후집주석정오(古文眞寶前後集註釋正誤)」는 『고문진보(古文眞寶)』 주석의 오류를 지적하고 바로잡은 것이다.
[묘소]
묘소는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남쪽 오토산(五土山) 서쪽 승방동(勝方洞)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49년(인조 27) 예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1796년(정조 20) 형 정사성, 호양(湖陽) 권익창(權益昌)과 함께 학암리사(鶴巖里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