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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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具鳳齡 |
영어음역 | Gu Bongryeong |
이칭/별칭 | 경서(景瑞),규봉(圭峯),백담(栢潭),문단공(文端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배종석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서(景瑞), 호는 백담(栢潭). 삼한삼중대광검교대장군(三韓三重大匡檢校大將軍) 구존유(具存裕)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구중련(具仲連), 아버지는 구겸(具謙),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권회(權檜)의 딸이며, 처는 함창김씨(咸昌金氏)이다.
[활동사항]
구봉령은 안동부(安東府) 동면(東面) 모산동(茅山洞)에서 태어났다. 7세에 모친상을 당하고, 11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초상집례(初喪執禮)를 행하면서 어른보다 더 잘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외종조 권팽로(權彭老)에게서 『소학(小學)』을 배웠고, 14세에는 삼가현감(三嘉縣監) 정이흥(鄭以興)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5년(인종 1) 비로소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 예문관검열, 예문관봉교를 거쳐 홍문관정자에 이르렀다. 홍문관에 있을 때는 척신(戚臣) 윤원형(尹元衡)이 권세를 휘두르며 정사를 어지럽히자 과감히 앞장서서 그 죄를 논계(論啓)하기도 하였다. 1564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장원급제한 뒤 수찬, 호조좌랑, 병조좌랑을 거쳐 1567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이후 정언, 전적, 이조좌랑, 사성, 집의, 사간을 두루 거쳤다.
1573년(선조 6)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동부승지, 우부승지, 대사성, 전라도관찰사, 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77년 대사간에 오르고, 이듬해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의, 형조참의를 지냈다. 1581년에는 대사헌에 오르고, 이듬해 병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만년에는 정사(精舍)를 세워 후학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였다.
구봉령은 외직 생활에서 치적을 남겼는데, 암행어사로 황해도, 충청도 등지에 나가 흉년과 기황(飢荒)으로 어지럽던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관찰사로 부임하였을 때는 한결같이 성(誠)과 신(信)으로 공명정대하게 다스렸다. 일례로 언젠가 다스리는 고을에서 형제끼리 서로 송사하는 일이 있었는데 구봉령의 설득에 싸우던 형제가 감동하여 스스로 송사를 그만두고 서로 화해하여 화목해졌다는 얘기도 전한다. 또한 조정에 있을 당시가 동서의 당쟁이 시작될 무렵이었으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을 지키고자 힘썼다.
[학문과 사상]
구봉령은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문집 9권의 ‘구관성인지도필자맹자시(求觀聖人之道必自孟子始)’에서 맹자의 도는 맹자의 도가 아니고 성인의 도이므로, 성인의 도를 구해서 보려면 맹자의 마음에서 시작해야 된다’라 하여 『맹자(孟子)』를 학문의 시작으로 여겨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기대승(奇大升)과 비견되었고, 「혼천의기(渾天儀記)」를 짓는 등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백담집(栢潭集)』과 『백담집속집』이 전한다. 문집은 연보(年譜), 문집(10권), 부록, 속집(4권) 등 모두 6책으로 되어 있다. 속집은 1811년(순조 11) 안동의 유생인 이유수(李裕垂), 김성구(金成九) 등이 김굉(金㙆)의 교정을 거쳐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1934년에는 후손인 구만회(具萬會) 등이 문집을 중간하였다.
[묘소]
1586년(선조 19) 안동부 안문산(安門山) 미도(味道)의 산기슭에 장사지냈다.
[상훈과 추모]
1612년(광해군 4) 용강서원(龍山書院, 일명 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1841년(헌종 7) 문단(文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