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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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滉 |
영어음역 | Yi Hwang |
이칭/별칭 | 경호(景浩),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청량산인(淸凉山人),문순(文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안병걸 |
성격 | 문신|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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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
성별 | 남 |
생년 | 1501년 |
몰년 | 1570년 |
본관 | 진성 |
대표관직 | 대제학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개설]
이황은 안동에서 태어나 학문 활동을 하였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주자(朱子)의 이기(理氣) 철학 및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천명도(天命圖)」 및 『심경(心經)』을 바탕으로 한 경(敬)의 철학을 수립하여 조선 중기 이후 한국의 유학사에 큰 영향을 남겼다.
[가계]
본관은 진성(眞城). 고조부는 군기시정을 지낸 이운후(李云侯), 증조부는 선산도호부사를 지낸 이정(李禎), 할아버지는 봉화훈도를 지낸 이계양(李繼陽),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埴), 어머니는 춘천박씨(春川朴氏)이다. 처는 둘로 초취부인 김해허씨(金海許氏)는 진사 허찬(許瓚)의 딸이고, 재취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봉사 권질(權礩)의 딸이다. 넷째 형이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이해(李瀣)이다.
[활동사항]
이황은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춘천박씨의 양육을 받았으며, 소년기에는 숙부 이우(李堣)에게 배웠다. 34세 때인 1534년에 문과에 합격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쳤다. 호조좌랑이던 37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룬 뒤 39세에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가 사가독서를 받아 독서당에 들어갔다. 42세 때 충청도어사로 나가서 탐학한 관리를 적발하였고, 45세 때 홍문관전한으로 있던 즈음에는 「왜의 사신을 거절하지 말기를 비는 소(乞勿絶倭使疏)」를 올렸다.
을사사화 뒤인 1546년에 토계(兎溪, 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독서에 전념하였는데 이즈음부터 퇴계(退溪)라는 별호를 사용하였다. 48세에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편액, 서적, 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되도록 하였다.
49세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한서암(寒棲庵)에서 독서와 강학에 열중하였다. 52세 때에 홍문관교리가 되어 조정에 올라갔다가 집의, 부응교를 거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얼마 뒤 형조참의, 병조참의가 되었지만 모두 사양하였다. 이 전후로 내린 벼슬이 이십여 차례인데 사양하고 나가지 않거나 잠시 나갔다가 이내 돌아오곤 하였다. 53세에 한양에 있던 중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를 보고 그 내용을 수정하고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58세 때에는 전라도 장성 출신 선비 기대승(奇大升)의 질의를 받고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한 논변을 시작하였다. 편지를 통하여 오고간 이 토론은 이황의 나이 66세 때까지 8년간 진행된 학술적 대토론이었다.
1561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지었는데, 이후로는 제자들과 더불어 강학하고 독서하며 저술하기에 열중하였다. 1567년 봄 명의 사신이 온다는 소식과 함께 소명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자 마침 명종이 승하하였다. 선조가 등극하면서 예조판서가 되었는데 명종의 행장을 짓고 이내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1568년 우찬성이 되었으나 다시 사양하자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그 해 7월 대궐로 나아가 새 임금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또 경연에서 선조에게 「사물잠(四勿箴)」과 「서명(西銘)」, 『논어(論語)』, 『주역(周易)』을 강의하였다. 12월에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바쳤다.
이후 대제학, 이조판서, 우찬성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569년 3월 여러 차례의 사직 상소 끝에 고향에 돌아왔다. 1570년 7월에는 제자들과 함께 새로 지은 역동서원(易東書院)에서 『심경(心經)』을 강의하는 등 학문 탐구에 몰두하다가 그 해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생애의 후반인 사십대 이후에 양성한 제자가 삼백여 명에 달한다.
[학문과 사상]
17세 즈음에는 안동부사로 재임 중인 숙부 이우를 찾아가 안동향교에서 수학하였는데, 이즈음 경상도관찰사로서 역내를 순행하던 중에 안동에 들른 김안국(金安國)을 만나고 도학(道學)을 알게 되었다. 20세 즈음에는 『주역』에 심취하여 침식을 잊어가며 탐구한 결과 병을 얻기까지 하였다. 33세에 성균관에서 수학할 즈음 『심경부주(心經附註)』를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43세에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읽은 이래로 평생을 두고 주자서를 탐구하였다.
예안에 은거하기 시작한 50대 이후부터 본격적인 저술을 시작하였는데 주요한 것만을 추리면 「천명신도(天命新圖)」, 「천명도설후서부도(天命圖說後序附圖)」, 「숙흥야매잠주해(夙興夜寐箴註解)」(이상 53세),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56세) , 『계몽전의(啓蒙傳疑)』(57세), 『자성록(自省錄)』(58세),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 「백록동규집해(白鹿洞規集解)」(이상 59세), 「도산잡영(陶山雜詠)」(61세),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63세), 「심무체용변(心無體用辨)」(64세), 『경현록편정별록(景賢錄編定別錄)』(65세), 「심경후론(心經後論)」·「양명전습록변(陽明傳習錄辨)」(이상 66세), 「무진육조소」, 『성학십도』, 「서명고증강의(西銘考證講義)」(이상 68세), 『경서석의(經書釋疑)』(69세) 등이다. 이 중에 그의 대표적인 저작은 『주자서절요』와 『성학십도』를 꼽는다.
이황의 주된 사상은 주자의 주리철학과 『심경』에 토대를 둔 경(敬)의 사상이다. 우선 주자의 주리철학에 입각하여 정지운의 천명도를 수정하고 「천명도설」을 지었는데, 그 요점은 인간의 도덕원리가 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뒤에 기대승과의 8년에 거친 대토론인 사단칠정논쟁의 발단이 되는데, 인간도덕, 즉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한 것이라는 논리는 주자학에서 채택한 퇴계의 기본적인 철학이다.
기대승과의 토론 중에 일부 수정을 하면서도 이황이 끝내 견지한 주장은 바로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라는 주장인데, 그 이유는 인간도덕은 바로 이 세계의 중심으로서 불변의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 사상은 이러한 인간도덕을 마음 가득히 채워갈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황의 학문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중심적인 학설이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에는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 후지와라 이래로 근래에까지 계승되어 왔다. 1970년에는 서울에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되어 국내외의 퇴계학 연구를 주도해 오고 있다. 이후 이황을 연구한 국내외의 전문 논저가 이천여 편이 넘는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퇴계집(退溪集)』(원집, 별집, 외집, 속집)이 있다. 저서로 『성학십도(聖學十圖)』,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계몽전의(啓蒙傳疑)』, 『경서석의(經書釋疑)』,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등이 대표적이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건지산(搴芝山) 남록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세상을 떠난 직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574년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상덕사(尙德祠)에 위패를 모신 것을 시작으로 전국의 유림단체에서 40여 개의 서원과 사당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1575년 문순(文純)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1609년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