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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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退溪宗宅 |
영어공식명칭 | Yi Hwang(pen name:Toegye)'s Head Residence |
영어음역 | Toegye Jongtaek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68-2[백운로 268]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진영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2년 12월 1일 - 퇴계종택 경상북도 기념물 제42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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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퇴계종택 경상북도 기념물 재지정 |
성격 | 고가 |
양식 | 민도리 형식 |
건립시기/일시 | 1926년~1929년 |
정면칸수 | 7칸(사랑채)|6칸(안채)|5.5(추월 한수정)|3칸(사당) |
측면칸수 | 2칸(사랑채)|2칸(안채)|2.5(추월 한수정)|2칸(사당)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68-2[백운로 268] |
소유자 | 이근필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북도 기념물 |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전통 가옥.
[개설]
퇴계종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대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종가이다. 이황은 155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하여 풍기군수·예조판서·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하였으며, 성리학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 전력하였다.
[위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68-2번지[백운로 268]에 있다. 야산을 등지고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동남향으로 앉아 있다.
[변천]
처음 퇴계종택은 동암(東巖) 이안도(李安道)가 한서암 남쪽에 지었고, 1715년(숙종 41) 정자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을 건축하여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이후 10세손 고계(古溪) 이휘녕(李彙寧)이 구택의 동남쪽 건너편에 새로 집을 지어 옮겨 살았다. 그러나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두 곳 종택이 다 불타 버렸고, 현재의 퇴계종택은 1926~1929년 13세손 하정(霞汀) 이충호(李忠鎬)의 주관으로 재건된 것이다.
[형태]
총 34칸의 건물로 전체적으로 보면 5칸 솟을대문과 ‘ㅁ’자형 정침 영역, 그 동북쪽 약간 뒤로 같은 규모의 5칸 솟을대문과 추월 한수정으로 이루어진 영역, 그리고 이 두 영역의 뒤쪽에 있는 사당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대문채는 솟을대문의 양쪽에 온돌방을 2칸씩 꾸몄고, 사랑 마당을 면한 사랑채는 안채보다 기둥 간격을 좁힌 정면 7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동측 4칸은 앞쪽에 툇마루를 길게 놓고, 뒷 칸에는 동에서부터 서로 사랑마루방과 사랑방을 2칸씩 들였다. 서측 3칸은 책방·작은사랑방·서향한 툇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인데 안대청 동측에는 앞뒤로 통간인 건넌방이 있고, 서측에 있는 안방 2칸은 양개문으로 통하게 된 통칸방들로 앞쪽에 남긴 툇마루 반 칸만큼 뒤로 물렸다.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동익사는 앞에서부터 중문간·광·방(房)·문간이 이어져 있고, 서익사는 창고·방·방·문간이 각 1칸씩 이어져 있다. 사랑이나 안채 부분은 모두 민도리집이고 기둥은 방주(方柱)로 세웠으며, 5량가에 제형 판대공을 올렸다.
계단이 좌우에 설치된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앉아 있는 추월 한수정은 정면 5.5칸, 측면 2.5칸의 ‘ㅡ’자형 집이다. 대청 서측에 1칸과 1.5칸 온돌을 앞뒤로 두었고, 동측에는 동서로 긴 2칸통 방을 앞뒤로 배치하고 전면에 반 칸 툇마루를 길게 놓았다. 전면의 기둥들과 대청 배면의 가운데에는 두리기둥을 세웠고, 5량가에 제형 판대공을 올린 민도리집이다. 화강석 기단 위에 서 있는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전면 벽은 반 칸을 약간 넘게 뒤로 물려 전퇴(前退)를 두었다.
[현황]
1982년 12월 1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2009년 현재 소유자 및 관리자는 이근필이다.
[의의와 평가]
퇴계종택은 전체적으로 사대부가의 공간 영역을 구비한 가옥으로 솟을대문과 추월 한수정 등 품위와 규모를 갖춘 대종가이다. 또한 옛 살림살이의 풍모도 비교적 남아 있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