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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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橃 |
영어음역 | Gwon Beol |
이칭/별칭 | 중허(仲虛),충재(冲齋),훤정(萱亭),송정(松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주부 |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개설]
중종조 조광조(趙光祖)·김정국(金正國)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 정치에 안동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으며, 사림의 도학정치를 주장하였다.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훤정(萱亭)·송정(松亭). 아버지는 성균생원 권사빈(權士彬), 어머니는 주부 윤당(尹塘)의 딸, 처는 화순최씨(和順崔氏)로 직장(直長) 최세연(崔世演)의 딸이다. 아들로 권동보(權東輔)와 권동미(權東美)가 있다.
[활동사항]
권벌은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 도계촌에서 태어났다. 1496년(연산군 2) 진사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였다.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할 때, 당시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알리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계(堂上官階)를 삭탈하도록 청하여 직신(直臣)으로 이름을 떨쳤다.
1514년 이조정랑에 임명되었고, 그 뒤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영천군수에 임명되었다. 1519년 예조참판이었을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도정치를 극렬히 주장하자 기호 지역 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정하려고 하였다. 이후 아버지가 연로하고 병이 있음을 들어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나갔다. 1519년 11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하였다.
1520년 43세 때 안동부(安東府) 내성면(乃城縣) 유곡(酉谷)에 은거하였다. 이후 1533년 복직되어 용양위부호군에 임명되었다. 밀양부사를 거쳐 1537년 12월 한성부좌윤이 되었고 이듬해 2월 경상도관찰사, 10월에는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539년 3월에 병조참판에 임용되고, 6월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7월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동지사 임권(任權)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1545년(인종 1) 5월 의정부우찬성이 되었고 7월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8월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허자(許磁), 임백령(林百齡) 등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 세력이 대윤(大尹) 윤임(尹任) 세력을 배척하자 이에 반대하여 윤임, 유인숙(柳仁淑), 유관(柳灌)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啓辭)를 올리기도 하였다. 곧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고 길원군(吉原君)에 봉해졌으나 9월 우의정 이기, 우찬성 정순붕 등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삭훈되었고 10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처음 구례로 유배지가 결정되었으나 곧 태천(泰川)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삭주(朔州)에 이배되어 이듬해 유배지에서 죽었다. 1567년(명종 22) 신원되었다. 권벌은 조정에 있는 동안 경연시독관·참찬관 등으로 왕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했으며, 평소 독서를 좋아해 『자경편(自警篇)』과 『근사록(近思錄)』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충재집(冲齋集)』 9권 5책이 있다. 문집의 권3 『한원일기(翰院日記)』는 예문관검열·예문관대교 등 사관으로 있던 1507년(중종 2) 12월 1일부터 1508년 12월 26일까지의 기록이며, 권4·5 『당후일기(堂后日記)』는 승정원주서로 있을 때의 기록이며, 권6 『승선일기(承宣日記)』는 승지로 있던 1518년 5월 15일부터 11월 6일까지의 기록이다. 세 일기의 합칭인 『충재일기(冲齋日記)』는 조정에서 일어난 제반 사항이 거의 매일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사료로서 『미암일기(眉岩日記)』, 『석담일기(石潭日記)』, 『덕계일기(德溪日記)』 등과 함께 당시 조정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중마을(내유곡) 큰재궁골에 있다.
[상훈과 추모]
1568년(명종 23)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588년(선조 21)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591년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의 종계(宗系)가 바로잡혀 속찬(續纂)되자 나라를 빛낸 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국원종1등공신에 녹훈되어 불천위(不遷位)로 제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