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3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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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台佐 |
영어음역 | Ryu Ijwa |
이칭/별칭 | 사현(士鉉),학서(鶴棲),유태좌,유이좌,류태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주부 |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현(士鉉), 호는 학서(鶴棲).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류사춘(柳師春)이고, 어머니는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예조판서를 역임한 이억지(李億之)의 딸이다.
[활동사항]
류이좌(柳台佐, 1763~1837)는 어머니가 특이한 꿈을 꾸고 낳아 외할아버지가 “이 아이는 천리구(千里駒: 뛰어나게 잘난 자손을 칭찬하여 이르는 말)로 서애(西厓)에게 그 후손이 있다.”라고 하면서 칭찬하였다. 7세에 큰아버지인 외재공(畏齋公)에게 수학하였는데, 문의(文義)가 숙달(夙達)하여 외재공이 사랑하였으며 소문이 무성하여 가까운 인척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을 배알할 때 채제공이 그의 학식을 시험해 보고는 “이름이 헛되지 않다”라고 칭찬하였다.
1794년(정조 1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가 되었고 주자서(朱子書) 3책을 하사받았다. 1796년(정조 20) 경연에서 주자서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시강(侍講)하였고, 1800년(정조 24) 사간원정언이 되었다가 곧 부여현령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807년(순조 7) 안변부사로 있으면서 화재로 소실된 무기고와 병기를 복구하였다. 1810년(순조 10) 군자감정과 홍문관교리를 지냈다. 1820년 예조참의와 1822년 동부승지 및 1829년 오위도총부부총관·승정원우승지·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돈녕동의금부(敦寧同義禁府)가 되었고, 겨울에 정경세(鄭經世)의 연보(年譜)와 구보(舊譜)를 개정하여 펴냈으며, 거처하는 청사를 고쳐 화경당(和敬堂)이라 하고 기문을 지었다. 1837년(헌종 3) 가을 도산서원에서 사림의 천거로 동주(洞主)가 된 뒤 『퇴계집(退溪集)』을 중간하였으며, 미간행본 12권의 책을 찾아내어 간행하고자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한 채 질병으로 화경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리학에서는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견해를 따랐으며,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문집인 『학서집(鶴棲集)』 20권 10책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