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22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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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婚禮 |
영어의미역 | Marriage Ceremony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집필자 | 박동철 |
[정의]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혼인과 관련하여 행해지는 일련의 의례.
[개설]
혼인은 가족을 구성하는 최초의 절차로서, 남녀 두 사람의 사회적·경제적인 결합을 기본으로 한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가족을 이룬다는 지위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두 가문(家門)의 결합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혼례를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할 정도로 중요시하였다. 인간이 사회적 공동체를 이루고 살기 시작한 이래로 생겨났을 혼례는 정확한 기원을 따지기 어렵다. 다만 의례로서 여러 절차들의 기원을 추측할 따름이다.
[연원 및 변천]
오늘날 혼례는 ‘혼인하다’라는 뜻을 가진 ‘혼(婚)’자를 쓴다. 그러나 예서인 『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는 ‘해질 무렵’이라는 뜻을 가진 ‘혼(昏)’자를 사용하여 ‘혼례(昏禮)’라 표기하고 있다. 또 『백호통(白虎通)』에서는 “해가 저무는 시간에 예를 올리므로 혼례라 한다(昏時成禮故曰昏禮)”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옛날에는 해가 지는 저녁 무렵에 혼례를 올렸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혼(婚)’자의 기원을 ‘저녁에 여자의 집에 가다’라는 의미에서 ‘혼인하다’라는 뜻이 생겨났다고 보기도 한다.
문헌에 의하면 전통적인 혼례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주나라 때부터 시작된 주육례(周六禮)와 주자가 주장한 사례(四禮)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모두 중국의 예법으로 우리나라의 절차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조선시대에 이르러는 국가에서 중국의 사례에 맞추어 혼례를 올릴 것을 권장하기도 하였으나,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통 혼례는 고유의 방식인 혼담(婚談)·사주(四柱)·택일(擇日)·납폐(納幣)·예식(禮式)·우귀(于歸) 등의 순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세부적인 절차에서 중국의 주육례와 사례의 절차가 조금씩 혼재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신식 결혼식이 생기면서 이러한 절차상에 큰 변화는 없으나 방식은 크게 변화하였다. 연애결혼이 생기면서 혼담이 사라지기도 하고, 사주를 교환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납폐는 행해지지만, 함진아비가 하던 역할을 신랑의 친구들이 하고 있다. 함은 예에 따라서 챙기기도 하지만, 오늘날에 맞는 구성으로 많은 변화가 있다.
신부 집에서 거행하던 혼례는 전문 예식장이나 교회 등에서 행해지고 있으며, 예식도 현대식으로 하고 있다. 우귀 대신 결혼식의 마지막 절차로 폐백을 끼워 넣어 행하는 것도 바뀐 점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혼례는 전통 혼례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현재 안동 지역에는 두 곳의 예식장이 있어 이곳에서 대부분의 결혼식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교회에서 예식을 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절차]
일반적으로 전통 혼례의 절차에 따르면 혼담이 오간 후 사주를 교환하고, 혼례 날짜를 잡은 후 신랑 측에서 신부 측에 예물을 전하는 납폐를 행한다. 혼례 당일에 신부 집에서 예식을 치르게 되는데, 이를 대례(大禮)라 한다. 대례가 끝난 후 3일 뒤에는 신부가 시댁으로 들어가는 신행을 행한다. 여기서는 안동시 풍산읍 서미1리에 거주하는 주민 구원식(79세)과 운산댁(76세)의 사례를 통하여 전통 혼례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한다.
1. 혼담과 중매
구원식과 운산댁은 1947년에 혼례를 올렸다. 운산댁은 16세에 혼인을 올렸는데, 일제의 처녀 공출을 염려한 부모가 일찍 시집을 보낸 것이다. 혼인은 집안 어른의 중매로 이루어졌으며, 혼인이 성사되자 중매쟁이에게 고무신을 사 주었다. 나이가 어리고 철이 없던 운산댁은 중매가 들어온 줄도 모르다가 부모의 명에 따라 혼례를 올렸다. 당시에는 연애로 혼인을 하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저끼리 만나 간다”고 흉을 보았고, 중매로 혼인을 해야만 점잖게 한 것이라고 여겼다.
2. 초행
혼례는 음력 동짓달 스무 나흗날에 올렸다. 구원식은 사모관대를 하고 가마를 타고 왔는데, 가마 문을 닫지 않고 열고 왔다. 신부가 사는 마을에 도착한 신랑은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 곧장 대례청으로 들어왔다. 신랑 측의 상객으로는 아버지가 따라 왔다. 상객은 신랑과 함께 초행을 가는 최고의 어른을 뜻한다. 신부는 당일 아침에 일어나서 일가 형님의 도움을 받아 족두리를 쓰고 연지곤지를 찍었다. 이때 도와주는 사람은 반드시 남편이 살아 있는 여성이어야 한다. 족두리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을 빌렸다.
3. 대례
행례는 신부집 마당 한가운데에서 행해졌다. 혼례를 위한 행례반에는 대나무를 꼽은 병을 양쪽에 놓고, 그 사이에 청실홍실을 걸었다. 보자기에 싼 장탉과 암탉을 올리고, 나무오리도 놓았다. 쌀 한 그릇은 행례반 가운에 올리고, 대추와 밤 등도 놓았다. 상 위에는 차일을 친다. 이는 혼례 시에는 하늘을 봐서는 안 된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행례반 뒤로 병풍을 펼치면 준비가 끝난다.
예식은 홀기(笏記)에 따라 진행되는데, 홀기는 신부 마을의 글을 잘 아는 어른이 불렀다. 마당에서 예식이 끝나면 신부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신랑은 사랑으로 들어가 어른들에게 절을 한 뒤 점심을 먹었다. 운산댁은 묵신행을 했다. 때문에 혼례를 마치고 상객으로 온 신랑 아버지는 점심 식사 후 바로 집으로 돌아갔지만, 신랑은 5일 동안 처가에 머물렀다.
4. 첫날밤과 신방 엿보기
첫날밤을 위하여 신부가 먼저 신방에 들어가는데, 이때 이미 방안에는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상 위에는 행례반에 놓였던 밤이 있었는데, 그것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였다. 신랑과 신부는 술을 한 잔씩 나누어 마시고, 밤을 까먹었다. 문 밖에서는 집안의 일가친척들이 주렁주렁 모여서 손가락으로 문에 구멍을 뚫고 훔쳐보면서 신랑에게 족두리와 옷을 벗기라고 시켰다.
신방 훔쳐보는 사람도 상객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장난을 쳐야 잘 산다고 했다. 상객이 없으면 부모라도 해야 했다. 비록 첫날밤이었지만, 신부는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했기 때문에 신랑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아무 것도 모르고 시집와 겁에 질린 운산댁은 뜬 눈으로 첫날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신방을 나왔다.
5. 신랑다루기
이튿날 저녁을 먹은 뒤 처남들과 이웃 사람들이 모여 신랑다루기를 하였다. 신랑다루기는 신랑의 발을 시렁에 매달아 놓고 발바닥을 때리는 것이다. 이때 신부 어머니가 돈을 내놓아야 한다. 혼례 후 5일째 되는 날 신랑은 걸어서 시댁으로 돌아갔다. 며칠 후 ‘재질’이라 하여 떡을 하여 짐꾼에게 짊어 지이고 신부를 보러 왔다가 며칠 묵고 돌아갔다.
6. 신행
신부가 시댁으로 오는 신행은 정월 스무 이렛날 행해졌다. 원래는 친정에 더 있다가 올 예정이었지만, 시증조모의 병환으로 시댁에서 일찍 오라고 했기 때문에 급히 날을 받아 온 것이다. 상객으로는 신부의 아버지가 동행했고, 신부는 마을의 가마를 빌려 타고 왔다. 가마 안에는 놋요강에 찹쌀을 넣고 계란 하나를 중간에 얹은 것을 빨간 보자기에 싸서 넣어 왔다.
신행을 갈 때는 혼수를 해 간다. 신랑 집에서 보내준 옷감과 이불감, 이불솜 등으로 시어른들과 신랑의 예물 옷을 하고, 이불도 만들어 왔다. 혼례 후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준 반다지 농이 있는데, 거기에다 예물 옷을 넣고 신행 때 함께 가지고 왔다.
가마가 시댁의 대문 앞에 이르면 가마꾼들은 시댁에서 미리 준비해 놓은 세 무더기의 짚불을 발로 차고 들어간다. 가마가 도착하면 기다리던 사람이 가마 문을 열고 신부에게 감주를 먹인다. 그 후 시어머니는 신부가 싸온 찹쌀을 한 움큼 쥐어 그릇에 담고 계란을 가운데 얹어 신부에게 준다. 그러면 신부는 그 그릇을 앉고 가마에서 내려 시댁의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예수드리기를 할 때까지 방에서 기다린다.
7. 신부 큰상받기와 예수드리기
예수드리기는 마당에서 행해진다. 운산댁은 예수드리기를 할 때에 친정에서 가져온 감주와 청주 한 병씩과 5합을 상위에 차려 놓았다. 5합에는 밤·대추·엿·계란·고기 등이 들어 있었다. 절은 시부모, 시조모, 가까운 일가친척 순으로 했다. 절을 받는 사람은 상에 차려진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 시어머니는 절을 받은 후 밤과 대추가 든 함을 머리에 이고 춤을 추기도 했다.
예수를 드리고 나면 신부는 방에 들어가 음식상을 받는데, 이것을 대반상이라고 한다. 상을 받을 때에는 신부 혼자 두지 않고 시댁의 일가 중 가정이 평안한 여자가 곁에 앉아 음식을 권한다. 이때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누구든지 방에 들어오면 반드시 일어났다 앉아야 했다. 모든 절차가 끝나면 신혼 방에서 잠을 잔다. 구원식의 집에는 다행히 신혼 방이 준비되어 있어 신랑 신부가 함께 잤다.
8. 신부회가와 근친
시집온 신부는 마을의 일가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드린다. 운산댁은 시숙모와 함께 인사를 다녔는데, 이것을 ‘집안에 밥상 먹으러 다닌다’고 했다. 신행 후 석 달 후에는 친정을 다녀오는 근친을 행했다. 이때 떡과 고기를 싸 가지고 가 5일 동안 친정에 머물렀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혼례를 위한 행례반에 오른 대추와 밤을 먹으면 시집·장가를 일찍 간다는 속설이 있어, 처녀·총각들이 서로 먹으려고 다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