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2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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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族詩人李陸史 |
영어의미역 | National Poet, Yi Yuksa |
이칭/별칭 | 이원록,이원삼,이활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손병희 |
[개설]
이육사는 1904년 4월 4일(음력)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현재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서 이가호(李家鎬)와 허길(許吉)의 차남으로 태어나 1944년 1월 16일(양력) 중국 베이징 주재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며 이원삼(李源三), 이활(李活)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삶의 기록과 투쟁의 나날]
이육사는 고향의 도산공립보통학교, 영천의 백학학원을 거쳐 일본의 동경정칙예비교(東京正則豫備校), 일본대학 문과 전문부, 그리고 북경의 중국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유가(儒家)의 매운 가풍과 가학(家學)은 전통과 주체성을 내면화하고, 중국과 일본 유학은 근대의 지식과 사상을 흡수하고 세계 질서와 상황을 조망하는 통로가 되었다.
1925년경 이육사는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에 관여하는 한편 항일 활동에 참여하였고, 1927년 장진홍(張鎭弘)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의거에 연루되어 장기간 투옥되었다가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그 뒤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활동했지만, 광주학생의거와 대구배일격문사건 등으로 예비 검속을 당하거나 피검되어 거듭 옥고를 치렀다.
1932년 의열단이 중국?남경 교외에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함으로써 적극적인 항일 무력 투쟁에 투신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목적은 ‘한국의 절대 독립’과 ‘만주국의 탈환’이었고, 졸업생들의 활동 목표는 ‘일제 요인 암살’과 ‘조선과 만주의 혁명 준비 공작’이었다. 그러나 이육사는 귀국 후 체포되어 모진 옥고를 또 다시 치러야 했고, 이후의 활동은 주로 창작에 집중되었다.
[폭넓은 문필 활동]
이육사는 시·시조·한시·소설·수필·비평·번역에 걸친 다양한 갈래의 글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영화예술(1938) 동인에 참가함으로써 당시로서는 새로운 예술인 영화와 시나리오에 대한 관심도 보였다. 이육사의 글에서 다룬 주제는 나라 안팎의 사회, 정치, 경제, 예술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고 다채롭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시를 비롯한 창작 문학에는 대체로 ‘(이)육사’를, 사회적·정치적 주제를 다룬 평문들에는 ‘이활’이란 이름을 사용하여, 글쓰기나 장르에 대한 자의식의 일단을 살필 수 있다.
뛰어난 논객으로서 이육사는 수난기에 있는 각종 사회단체 활동의 침체가 외래의 억압과 자체의 부진에 기인한다고 분석하고, 필사적 노력으로 조직을 정비하여 국면을 타개할 것(「대구사회단체개관」)을 희망하고 촉구했다. 이육사는 문호 예술 분야 외에도 당대 국제 관계와 중국 정세에 대한 진단과 전망을 제시한 일련의 평문도 발표했는데, 이 글들은 이육사가 매우 폭넓은 지식과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육사는 사회주의를 비롯한 당대의 폭넓고 다양한 이념과 사상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몰주체적이거나 서구 편향적 지식인이 되지는 않았다.
[시 정신의 바탕]
이육사의 문학 창작을 일제의 철저한 감시와 거듭된 피검에 기인한 것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실상과 어긋나는 지나친 단순화이자, 이육사의 문학을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는 잘못된 접근을 조장하기 쉽다. 이육사는 온갖 “고독이나 비애를 맛볼지라도 시 한 편만 부끄럽지 않게 쓰면 될 것”, 그리고 자신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계절의 오행(季節의 五行)」)이라고 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자의식과 지향을 뚜렷이 표명한 바 있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육사의 자의식과 지향은 그의 시가 정치 투쟁의 우회적인 방략으로 선택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육사의 절창으로 꼽히는 「절정(絶頂)」, 「광야(曠野)」, 「청포도(靑葡萄)」 등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언어와 구성 등 심미적 형식으로서 깊은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육사의 실질적인 문단 진출작인 「황혼(黃昏)」은 시인의 의식 중심에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자리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거듭된 고문과 투옥 끝에 병상에서 쓴 「황혼」은 우주적 사랑이 넘치는 시이다. 황혼이 세상을 품듯이, 외롭고 힘든 모든 존재에게 자신의 ‘타는 입술’을 맞추려는 이 순결한 애정은 참으로 넓고 우람해 특정 집단이나 민족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 우주적인 사랑은 육사의 시와 의식(사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통로로서 순결한 이상주의의 발로이자, “노랑나비도 오쟎는 무덤 우에 이끼만 푸”(「자야곡(子夜曲)」)른 참혹하고 불구적인 현실을 부정하고 비판할 수 있는 윤리적 기반이다.
[낭만적인 서정과 실천적 윤리]
이육사는 낭만주의 서정시인으로 출발했다. 이상주의적 성향과 개인의 주관을 분출하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억압적인 식민 체제는 이육사에게 “벼룩이 꿇어앉을 만한” 공간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 인식은 “한발 재겨 디딜 곳 없다”(「절정」)는 표현에서 그 극한에 이른다. 인간의 삶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상황 속에서, 이육사가 오히려 비장한 결의를 내포한 “비극적 황홀”(김종길)과 새로운 앎을 추구한다는 점은 놀랍기 그지없다.
이 놀라운 정신과 힘은 참되고 정당한 것, 그리고 생명과 역사의 불멸을 믿는 굳센 윤리적 확신과 소망에서 비롯한다. 목숨을 버리고 의로움을 구하는 선비 정신 역시 그 바탕을 이룰 것이다. 이육사는 일찍이 현실에 맞서 자기를 희생하려는 굳건한 의지를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위협적인 현실을 뛰어넘는 불멸의 생명 의지를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꽃」)으로 형상화했다.
이육사의 이러한 윤리적 확신과 소망은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기다리며, 준비하는,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실천을 바탕으로 한다. 눈 내리는 광야에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광야」) 시인의 행위가 그것이다. 이러한 ‘씨 뿌리기’는 마땅한 미래를 현실화하려는 실천적인 행위이며, 그 의지는 이미 “새로운 지구를 차지할” 날이 “오는 날”(「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로 신념화되어 있었다.
[빛나는 정신과 서정의 적극성]
암흑 속에서 빛나는 별을 노래하고 “오는 날”의 기쁨을 노래한 이육사는 거짓된 희망이나 자기 위안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이육사는 결코 현실의 위압에 압도되지 않았고 오히려 현실의 위압을 넘어서는 빛나는 정신의 경지를 보여 주었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광야」)을 기다리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의연한 모습이나 “서릿발 칼날 진” 위에 자신을 세우는 것을 보여 주는 비장한 아름다움이 그것이다.
그런 뜻에서 이육사의 기다림은 치유된 세계, 해방된 삶을 윤리적으로 강렬히 소망하고 확신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라는 손님”(「청포도」)이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위해 “하이얀 모시 수건”을 준비하고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은 마땅한 미래를 구성하는 적극적인 행위와 의지이다.
서정성 넘치는 「청포도」는 그러한 적극성이 도달한 세계이다. 여기서는 풍성한 마을의 역사가 복원되고, 무한한 하늘을 인간이 호흡한다. 그것은 황폐화한 현실의 재건이자 자연과 인간이 이룬 조화와 화합이다. 이 조화롭고 아름다운 공간에서 바라던 사람과 함께 우주의 기운이 충만한 청포도를 함께 먹는 일상의 향유야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의 근본 조건이다. 「청포도」는 정치적 해방을 싸안으면서도 뛰어넘는 해방된 세계이자, 그 세계를 향유하는 행복한 삶의 공간이다.
[의지와 신념의 시인]
이육사는 수필 「질투의 반군성(嫉妬의 叛軍城)」에서, 자신이 “부정할 바를 부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는 고민을 “혼자 무한히 고민”한다고 했다. 그것은 어느 시대든 남다른 의지와 자기희생의 각오 없이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심미적인 것이든 그것을 넘어서는 역사적이고도 정치적인 문맥의 것이든, 부정할 바를 부정하는 의지와 자기희생의 각오는 이육사의 면모를 집약하고 있다. 그러한 의지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이육사의 시편들은 심미적 형식인 까닭에 그의 시에 대한 지나친 정치적 강박증은 경계해야 마땅하고, 그것이야말로 이육사의 문학을 현재적 유효성과 감동의 세계에 머물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