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
충주사고는 1390년(공양왕 2)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592년까지 약 200년 동안 고려의 중요 전적과 조선 전기의 역대 실록 그리고 중요한 서책과 문서를 보관하던 창고의 하나였다. 그러나 1592년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패하여 충주시가지가 불탈 때 시가지 내에 있던 충주사고와 그에 보관된 서책들도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역사를 기록하여...
-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에서 담배를 소재로 부르던 유희요. 「담바귀 타령」이라고도 하는 「담배 노래」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광해군(光海君, 1608~1623) 원년에 일본으로부터 담배가 들어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에 퍼졌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때 동래·울산 지역에 오래 주둔하던 왜병에 대한 반발과 적의를 은연...
-
충청북도 충주시 이류면 대소리에 있는 산. 마산은 봉화불을 올리던 산으로서 일명 봉화산 또는 봉화뚝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로 마산의 산정에는 약 100㎡ 정도의 면적에 돌로 쌓은 축대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봉수대터라고 한다. 1898년에 편찬된 『충주군읍지』에서도 “마산 봉수는 충주에서 서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
임진왜란 중 충주는 가장 희생이 많았던 싸움터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신립 장군은 탄금대 앞에서 달천과 남한강을 뒤로 하여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8,000여 명의 조선군 중 두서너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할 만큼 희생이 큰 전투였다. 또한 충주읍성에 있던 많은 사람들, 즉 사민(士民)과 관속(官屬)들이 당대의 명장인 신립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음을 믿고 피난을...
-
조선 중기 조선을 침입한 왜군과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의 전쟁 1592년 4월 13일에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함으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포에 이어 동래를 점령한 일본군은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여, 상주 전투에서 이일(李鎰)을 격파하고 충주에서 신립(申砬)을 깨뜨린 뒤 이렇다 할 전투도 치르지 않고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가고, 조선은 7년 동안 일본군과...
-
조선 후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정경순은 조선 후기 영조 대부터 정조 대까지 활약한 문신으로, 문장과 덕망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기개를 지닌 선비였다고 전한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정옹(修井翁). 영의정을 지낸 정태화(鄭太和)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유생 정석경(鄭錫慶)이다. 형은 정원순(鄭元淳), 동생은 정지순(鄭持淳)이다. 정경순...
-
봉수(烽燧)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가장 빨리 변방의 소식을 중앙으로 전달하던 통신 수단이었다. 30여 리를 기준으로 서로 잘 보이는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쌓고 횃불과 연기를 올리는 중요한 시설이었다. 봉수제도가 처음 시작된 것은 삼국시대부터 실시되었지만 고려시대에 와서 체계적으로 정비되었고 조선 세종 때에 봉수대 시설과 봉군의 신분, 봉수의 노선을 구분하여 조선 봉수의 근...
-
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과 경상도를 잇는 주요 교통로였던 고개.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서울과 동래(부산) 사이를 연결하는 교통로였고,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다. 조령은 제1관문, 제2관문, 제3관문이 있으며, 이들 관문과 성벽은 1708년(숙종 34)에 축조되었다. 이 중 제3관문을 지나면 경상북도이다. 추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