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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456
한자 古代
영어의미역 Ancient Time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고대/고대
집필자 이창훈

[정의]

기원 전후부터 후삼국시대까지 충청북도 충주시의 역사와 문화.

[개설]

중국의 『삼국지(三國志)』에는 3세기 한반도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한반도의 중부와 남부 지역은 마한·변한·진한으로 구분되었으며, 70여 개의 소국(小國)이 있었다. 백제와 신라도 각각 백제국(伯濟國)과 사로국(斯盧國)이란 이름의 소국으로 등장하여 주변 소국들과의 경쟁을 통해 성장하였다. 한국 고대사회는 이러한 소국들이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영역을 확대하고, 그 영역의 지배를 위해 통치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하였다.

642년 백제가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함에 따라 삼국간의 긴장 상태가 촉발되었으며, 645년 당이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러한 한반도의 상황에서 648년 나당동맹(羅唐同盟)이 결성되었다. 7세기 중엽 나당연합군은 백제 사비도성을 함락한 후 백제부흥운동 지원군인 일본 함대도 격퇴했으며, 이어서 고구려 평양성까지 함락하였다.

그러나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한 후 고구려와 백제 지역까지 모두 지배하려고 하였다. 신라는 고구려부흥운동을 암묵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당과 전쟁에 돌입하였다. 당은 신라와의 전투에서 잇따라 패함에 따라 676년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김으로써 전쟁은 종식되었다. 한편, 요동에서 거란세력의 반란이 일어난 틈을 타서 고구려 유민들은 당으로부터 탈출하여 발해를 건국하였다. 그 결과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삼국의 항쟁]

충주는 마한의 소국 가운데 백제국이 주변 소국을 병합하면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백제는 이른 시기부터 청주 또는 충주로 비정되는 낭자곡성(娘子谷成)에 진출한 것이 확인되며, 4세기 근초고왕 때에는 영산강 유역을 제외한 마한의 대부분 지역을 확보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5세기에 고구려의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한 후 광개토왕 이래 지속되어온 영역 확대에 박차를 가했으며, 백제의 개로왕을 전사시키기까지 하였다. 고구려가 한강을 따라 남하하여 충주까지 장악함에 따라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왕도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군사적 거점으로 충주에 국원성을 설치하였다. 충주 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는 이러한 당시 정황이 담겨 있는 자료다.

6세기에는 신라의 팽창이 두드러졌다. 법흥왕대에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을 통해 내부의 체제 정비를 단행한 후, 진흥왕대에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항해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 세력을 한강 유역에서 물리쳤다. 신라는 죽령을 넘어 단양을 확보한 후 동해안을 따라 함경도까지 진출했으며, 한강 하류까지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면서 한강 유역 전역을 확보하였다. 단양적성비와 마운령·황초령·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는 이 시기 신라의 영역 확장을 웅변해주는 대표적인 자료다. 557년 진흥왕은 고구려의 국원성이 있던 충주에 소경을 설치하고, 왕경의 귀족 자제와 부유한 백성들을 국원소경으로 이주시킴에 따라 충주는 명실상부하게 왕경 다음가는 지방 중심지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충주는 삼국이 번갈아가며 차지한 곳으로 한강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각국에겐 중요한 거점으로 인식되어 중요시되었다. 따라서 충주에는 백제·고구려·신라의 문화가 융합되어 나타난다. 현재 충주에 남아 있는 다양한 문화유산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통일신라와 중원경]

7세기의 전쟁 상황에서 충주와 관련된 기록은 특별히 보이지 않는다. 충주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나 직접적인 전장(戰場)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673년 신라와 당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주요 지역에 대대적인 축성이 이루어졌다. 이때 충주의 국원성도 그 대상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백제 지역까지 확대된 신라 영토 전체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졌다. 영토가 확대된 상황에서 왕경인 경주는 동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지방 통치의 거점이 필요하였다. 이에 진흥왕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한 이래로 운영한 소경을 더욱 확대하였다.

678년(문무왕 18) 북원소경(北原小京)[원주], 680년(문무왕 20) 금관소경(金官小京)[김해], 685년(신문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청주]과 남원소경(南原小京)[남원]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국원소경을 포함하여 5소경 체제가 성립되었다. 또한 전국의 행정구역을 9개의 주(州)로 정비함에 따라 9주5소경의 지방제도가 완성되었다.

국원소경은 이후 757년(경덕왕 16) 각 지방의 행정구역 명칭을 변경할 때 중원경(中原京)으로 변경되었다. 중원경은 고려 태조에 의해 충주로 바뀌기 전까지(940) 공식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말까지 국원이라는 명칭이 계속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원경 외에도 그 지역 사람들에게 익숙한 국원이란 이름이 함께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 충주는 지정학적·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백제·고구려·신라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통일신라시대에도 이어졌다. 신라 사상 최대 규모의 반란 사건인 김헌창(金憲昌)의 난(822) 당시, 김헌창이 세력 확대를 도모할 때 국원경이 등장하였다. 또한 신라 말 호족세력들이 성장하여 각축전을 벌일 때, 북원에 거점을 두고 있던 양길(梁吉)궁예(弓裔)를 공격하기 위해 끌어들인 주요 세력이 ‘국원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상황으로 인해 충주는 문화적 복합성을 특징으로 하면서도 자기 정체성이 강한 중원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문화유산과 유물]

현재 충주에는 백제의 영향으로 짐작되는 유물이 발굴을 통해 단편적으로 수습될 뿐 백제의 것으로 단정할 만한 확실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에 비해 고구려계 유물이나 유적은 다수 확인되고 있다. 충주 고구려비는 5세기 고구려의 남진과 충주 진출을 증명해 준다.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은 고구려 미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이며, 건흥5년명 금동불 광배도 고구려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장미산성이나 탑평리 일대에서 출토된 토기 조각이나 기와 조각들은 백제·고구려·신라의 문화 요소들이 가미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어 삼국의 문화가 융합된 중원 문화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앙탑면누암리 일대에 밀집되어 있는 230여 기의 고분들은 신라가 이 지역을 장악한 6세기 중엽 이후에 축조되었으며, 여기서는 주요 세력 집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신라계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탄금대 유적은 가야 출신의 우륵이 신라에 귀화하여 진흥왕이 이 지역에 정착시킨 일화를 남기고 있다.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강수(强首)도 가야인의 후손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충주는 삼국뿐만 아니라 가야까지 포함한 한반도 문화의 용광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국보 제6호로 남북국시대 충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중앙탑으로 더 잘 알려진 이 탑은 주변 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사찰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일반적인 탑과는 다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고 있다. 탑의 성격은 신라 국토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한 것, 새로 영입된 지역과 백성들을 융합하고 제도하기 위한 것, 수륙 교통로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것, 풍수사상의 영향 등 다양하게 추정되고 있다. 탑의 형식은 대체로 신라 석탑의 정형성이 파괴되기 시작한 8세기 이후로 볼 수 있다. 건탑 연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7세기 후반설·8세기 말설·9세기 초반설 등 여러 가설들이 제기되었다.

김생사지(金生寺址)금가면 유송리에 위치한다. 이곳은 수습된 유물로 보아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김생[711~791]이 두타행(頭陀行: 번뇌를 끊고 의식주에 대한 탐심이 없이 깨끗하게 불법을 닦는 일)을 닦으며 이곳에 머물렀기에 김생사라 이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생은 그 이름이 중국까지 알려진 신라를 대표하는 명필로 고려의 유학자들이 해동(海東) 제일의 서예가로 평가하는 인물이다.

강수(强首)중원경 출신으로 당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작성한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7세기의 인물이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는 당과 신라의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에 신라의 입장을 수려한 문장으로 표현한 글로서 강수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한편, 충주시 단월동 등 여러 지역에서는 8~9세기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무덤군이 발굴 조사되었다. 이 무덤군은 신라 말 충주의 대표적인 호족인 유씨(劉氏) 세력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씨 가문의 유긍달(劉兢達)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세 번째 부인이자 정종광종의 어머니인 신명왕후(神明王后)의 아버지다. 유긍달을 비롯한 충주 호족세력은 후삼국의 혼란기에 왕건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러한 점이 훗날 태조가 이 지역에 ‘충성스러운 고장’을 의미하는 충주라는 이름을 내린 배경이 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노* 흔히 책에서 보면 고대라는 말이 많이 나오던데..정확하게 몇년부터 몇년까지를 고대라고 지칭 하는것인지에 대해 보다 자세하고 정확하게 잘 아시는 님의 답글 좀 부탁 드려봅니다.
  • 답변
  • 디지털충주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향토문화전자대전원고 집필 지침의 시대 분류표에 의한 고대는 고조선부터 후백제(기원전 2333년~917년)까지의 시대입니다. 감사합니다.
2014.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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