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0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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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强首 |
영어음역 | Gang Su |
이칭/별칭 | 우두(牛頭),자두(字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김현길 |
[정의]
고대 남북국시대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우두(牛頭) 혹은 자두(字頭). 석탈해왕(昔脫解王)의 18세손으로 아버지는 육두품 11관등 내마(柰麻) 석체(昔諦)이다. 강수의 조상은 경상남도 고령의 대가야 출신으로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신라에 귀화한 것으로 보인다.
[활동사항]
강수는 중원경(현 충주시) 출신으로 어머니가 꿈에 머리에 뿔이 난 사람을 보고 임신하였는데, 강수가 태어났을 때 보통 사람과 달리 뒷머리의 뼈가 높이 솟아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공부에 정진하여 커서 학문으로 대성했으며,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었다.
태종무열왕 즉위년에 당나라의 사신이 가져온 어려운 내용의 외교문서를 완벽하게 풀이하고, 뛰어난 문장력으로 당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답서를 작성함으로써 학식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 뒤 당나라, 고구려, 백제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하게 되었고, 당나라에 원병을 청할 때도 외교문서를 작성하였다.
당나라에 보낸 글 가운데 당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김인문을 석방해 줄 것을 청한 「청방인문표(請放仁問表)」는 당나라 고종을 감동시켜 곧 김인문을 풀어 돌려보내게 하였다. 재물에 뜻을 두지 않아 가난하게 지내므로 태종무열왕이 해마다 조 1백 석을 하사하였다. 또한 삼국이 통일된 뒤 그 공을 인정받아 문무왕으로부터 사찬(沙飡)의 관등과 아울러 녹봉도 해마다 2백 석을 더 받게 되었다.
태종무열왕이 강수의 이름을 물었을 때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고령의 대가야]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태종무열왕은 강수의 머리를 보고는 “강수(强首)라 부를 만하다.”고 하고 강수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학문과 사상]
아버지가 학문에 뜻한 바를 물었을 때 불교는 세외(世外)의 것이므로 유교의 도를 배우겠다고 하여 스승을 찾아가 유학을 배우게 되었다. 그가 공부한 것은 『효경(孝經)』·『곡례(曲禮)』·『이아(爾雅)』·『문선(文選)』 등으로 유교의 윤리이념과 아울러 글자와 문학에 관한 것에 비중을 두었다. 이리하여 유학자로서뿐만 아니라 문장가로서도 유명하게 되었다.
또한 부모가 양가의 규수에게 장가들게 하려고 하자, 일찍부터 정을 통하고 있던 대장장이 딸과의 관계를 들어 조강지처는 버릴 수 없다고 고집하였다. 이는 강수가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당시에 출세보다 유교적 윤리의식에 충실한 도덕적 실천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저술 및 작품]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가 강수의 글이라고 전해진다.
[상훈과 추모]
충주시에서 강수를 기리는 ‘강수추모제’를 열고, ‘강수백일장’을 시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