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5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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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場市 |
영어의미역 | Marketplac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욱 |
[정의]
조선시대부터 충청북도 충주에서 5일마다 열리는 사설 시장.
[개설]
고려시대에 주현 관아 부근에서 낮에만 열렸던 정기 시장은 조선시대에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을 펴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생산의 지역적 불균형과 흉년과 같은 자연 재해의 영향으로 15세기 말부터 장문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현했으며, 16세기 이래 급속히 확산되어 18세기 중엽에는 1,000개를 넘어섰다.
장문은 양적으로 확산되면서 질적으로도 발전되었다.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장시가 생겨났다. 한편 교역 규모가 큰 대장(大場)이 형성되면서 주변의 작은 규모의 장시를 흡수하기도 하고, 인접한 장시끼리 장을 여는 날짜를 조정하여 서로 겹치지 않게 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장시간 연계 관계와 시장권이 형성되었다.
[변천]
충주의 장시는 우리나라 장시의 추세 변화와 같은 선상에서 전개되었다. 조선 후기 충주 지역에서는 개시일이 각각 2일과 4일인 읍내장 2기를 포함하여 모두 11개의 장시가 열렸다. 그 가운데 가흥장·남창장·우목장은 18세기 말엽에서 19세기 전반의 어느 시점에 모두 폐지되었다. 한천장은 19세기 전반에 새롭게 개설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나타난 것은 충주의 유통 환경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흥장은 가흥창의 역할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1770년대 무렵 영남의 세곡이 돈으로 납부하는 것으로 바뀐 후 가흥창의 조운 담당 구역이 영남과 호서의 12읍에서 호서의 6읍으로 축소되었다. 조운 담당 구역의 축소는 상품 유통의 위축을 불러왔으며, 이로 인해 가흥장은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남창장 역시 창고가 위치한 곳에 열리던 장시였다. 창고의 역할 위축이 원인이 되어 장시의 소멸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우목장의 소멸은 애초에 수요 기반이 취약한 곳에 위치했던 데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장시 밀도가 조밀하여 좁은 지역 안에서 충분한 수요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한천장은 19세기 전반에 새로 개설되면서 개시일을 충주 읍내장과 같게 하였다. 이는 한천이 평야지대로서 우수한 수요 기반을 갖고 있으면서도 충주 읍내장의 영향이 미치기 어려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천장이 충주장과 개시일을 같게 함으로써 충주장과 한천장을 중심으로 각각 1일 내지 2~3일 간격으로 충주에 항상 장이 열리도록 조정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용안장도 개시일이 20세기 전반에 1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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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와 말기의 충주 장시 변화
[특징]
충주의 장시는 충주 읍내장을 중심으로 일정한 유통권이 형성되고 있었다. 충주 읍내장을 중심으로 인근의 장들이 신설되거나 폐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개시일을 조정함으로써 같은 유통권에서 거의 매일 장이 열릴 수 있는 변화도 나타났다. 이는 장을 돌아다니는 행상과 구매자의 필요가 서로 절충되면서 이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