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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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可興倉 |
영어의미역 | Gaheungchang Grain-Transport Warehouse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일성 |
[정의]
조선 말기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에 있던 조창.
[개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9곳의 조창(漕倉: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을 두었는데, 가흥창은 그 중의 하나이다. 충주는 남한강이 흘러 수륙교통이 편리하여 일찍부터 도시가 발달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남도 수군에 12창을 설치할 때 덕흥창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덕흥창에는 판관을 두고 충주 부근의 조세를 수납하여 경창으로 수송하는 임무를 띠고 정종[1034~1046] 때는 200석을 실어 나를 수 있는 평저선(平底船) 20척을 두고 수송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선 초기에 덕흥창의 남쪽에 경원창을 설치하고 경상도 세곡을 받아 보관하였다가 경창으로 수송하였다. 1465(세조 11) 지금의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면[현 중앙탑면] 가흥리로 옮겨 지명을 따라 가흥창이라 부르게 되었다.
[제정경위 및 목적]
1461년(세조 7) 4월에 경원창에 화재가 나고, 가흥리 뒤 가흥창이 위치한 남한강가의 바로 상류 목계리와 가흥리 사이 강에 막흐레기[莫喜樂灘]라는 여울이 있어 배가 왕래하기가 대단히 위험하였다. 또한 금천에 있던 경원창은 산에 의지하여 넓은 지역이 없으나, 가흥리는 강이 가까우면서도 물이 들지 않는 넓은 언덕이 있어 창고를 설치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에 충청도와 경상도의 전세를 수납하여 보관하였다가 경창으로 수송하기 위해 만들었다.
[관련기록]
『세조실록(世祖實錄)』 권35 1465년 정월 13일조에 “호조에서 오도경차관(五道敬差官) 김순명(金順命)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충주 금천 신창의 조세를 수납하는 곳을 청컨대 가흥역리로 옮기게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만기요람(萬機要覽)』1 재용편2 조운조에 “조창에는 전라도 성당창, 공충도 공진창, 경상도 좌·우조창, 후조창, 마산창, 가산창, 삼랑창이 있고, 수참에는 좌수참 충주 가흥창, 우수참 배천 금곡창”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충주의 가흥창은 충청도와 경상도의 전세를 수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가흥창은 조선 전기에 충청도 동북부의 13개 고을과 경상도 세곡을 수납하여 조선 초 9개 조창 중 세곡 수납 범위가 가장 넓었다. 그러나 인조와 영조 때 전세를 면포나 돈으로 환산하여 받고 경상도의 3조창이 설치되어, 가흥창의 전세 수납 범위는 좁아지고 정조 이후에는 호서 6읍의 전세만 수납하였다.
[변천]
가흥창에는 처음 세곡을 보관하는 창고가 없어 강변에 노적하였다. 1520년(중종 15)에 70여 간의 창고를 짓고 현종 때 50여 간의 창고를 지어, 도합 119간의 창고가 남한강가 가흥리 창말에 있었다. 창고에 보관된 세곡은 경창으로 수송하여 국가 경비에 충당하였으니 때로는 군수와 진휼 등에도 사용되었다.
[현황]
가흥창은 창고는 없어지고 그 터도 경작지로 변하여 분별하기가 어렵다.
[의의와 평가]
가흥창은 세곡을 받아 일시적으로 저장하였다가 서울 경창으로 옮기는 역할을 했던 창고이다. 하지만 한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많은 물류가 이동하는 중심점이었고, 그로 인하여 가흥은 번창하고 가흥을 안고 있는 충주도 발전하였다. 육로가 발달하고 수로가 쇠퇴하면서 가흥도 쇠퇴하고, 충주도 교통의 뒤안길로 밀려 오지의 도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