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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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可興兵站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배항섭 |
[정의]
1894년 일본이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 지역에 설치한 병참기지.
[개설]
불법적으로 경복궁을 강점한 일본이 이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청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가흥에 설치한 병참기지이다.
[제정경위 및 목적]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 대대적인 군대를 파견한 일본군은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이어 청국(淸國)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6월 23일 충청남도 아산 앞바다 풍도에서 청국(淸國) 군함을 격침시킴으로써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조선 전역이 청일전쟁의 전쟁터가 된 것이다. 일본은 일본군을 대거 상륙시킨 데 이어 조선 정부의 승인도 받지 않고 부산-낙동-안동-문경-가흥-이천-서울 송파로 연결되는 병참로를 개설하고, 수비병을 각 병참부에 배치하여 필요한 물자와 인부를 강제로 조달하였다.
조선 병참화를 위해 가장 먼저 파견된 부대는 군용전선가설대였다. 오오토리[大鳥奎介] 공사가 6월 23일 경성~부산 간 전선수리용의 전선과 공구를 요청하자, 일본 대본영에서 조선 정부로부터 가설권을 획득하여 경성-부산 간의 군용전선을 가설할 것을 지시하였다.
청일개전 후 당시 경성에서 청국(淸國)을 우회해서 상해(上海)를 경유하여 일본에 연결되던 전선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경성~부산 간에 군용전선을 가설하여 전쟁에 관한 모든 정보를 신속하게 송수신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조선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1·2전선가설대가 7월 3일과 4일에 각각 부산과 인천에 도착하였고, 7월 28일 3개의 병참부가 설치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경성~부산 간에 20군데의 병참부가 설치되었다. 또 8월 16일경에는 경성~부산 간 군용전선가설이 거의 완성되었다. 19일에는 군사상의 필요를 이유로 대구전신국까지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충주 가흥에도 병참부가 설치되고 일본수비대가 주둔하였다.
[관련기록]
가흥병참부 옆에 건립된 2기의 위령비가 있는데, 하나는 비석에 새긴 것이고, 또 하나는 자연석 바위를 깍아 새긴 비이다. 두 비 모두 1894년 12월(양력)에 새겼다. 비석의 크기는 가로 56㎝, 세로 90㎝, 너비 12.5㎝인데, 하단부 일부가 잘려 나갔다.
또 자연석의 위령비는 일본군 병참부가 위치했던 곳의 언덕 위에 솟은 바위를 깎아 새긴 비이다.
가로 55㎝, 세로 107㎝이다. 비문은 현재 주민들에 의해 훼손되어 전혀 판독이 되지 않으나, 훼손되기 이전에 확인한 자료에 의하면, 3행 세로로 ‘대일본제국 용사 남해위삼랑군지비 명치이십칠년십일월 유지건지(大日本帝國勇士南海爲三郞君之碑 明治二十七年十日月有志建之)’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1894년 7월 28일 3개의 병참부가 설치된 것을 시작으로, 경성-부산 간에 20군데의 병참부가 설치되었다. 8월 16일 경에는 경성~부산 간 군용전선가설을 거의 완성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가흥병참부이다. 가흥병참부는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어서 동학농민군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으나, 일본군에 의해 사수되었다. 1895년 유인석 의병부대가 충주성을 함락했을 때 공격했으나 빼앗지 못하였고, 일본군은 가흥병참부를 기지로 하여 충주성 전투를 벌여, 결국 의병부대는 충주성에서 철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