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5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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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紙洞里遺蹟 |
영어의미역 | Relics in Jidong-ri A Reg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물산포지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지동리 |
시대 | 선사/선사 |
집필자 | 길경택 |
성격 | 유물산포지|고분|집터|돌널무덤|고인돌|돌무지무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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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주소 |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지동리 |
소유자 | 수자원공사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지동리에 있던 신석기시대 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산포지.
[개설]
동량면 지동리는 제천과 접한 지역으로 동량면 하천리 정토사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정토사지는 고려 초에 이미 대가람을 이루어 법경대사나 홍법국사가 주석했으며, 고려 말에는 고려의 외사고가 한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지동리는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으나, 닥나무를 많이 심어 한지를 대량으로 생산하던 곳으로 전해진다. 이곳에서 생산된 종이는 정토사에서 소비한 것으로 생각된다.
[위치]
지동리 유적은 동량면 지동리 남한강 주변 충적대지상에 위치해 있었으나, 현재는 충주댐의 담수로 인해 수몰되었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1983년과 1984년 충주댐 수몰 지역 문화 유적 조사의 일환으로 경희대학교 황용훈 교수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신석기시대의 집터, 청동기시대의 집터·돌널무덤[石床墳]·고인돌, 초기철기시대의 돌무지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형태]
1)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집터 3기, 돌널무덤[石床墳] 3기, 고인돌 1기가 있다. 1호 집터는 표토 아래 20~25㎝ 깊이에서 노출되었으며, 남북 3.95m, 동서 3m 크기의 사각형에 가까운 네모꼴이다. 바닥은 진흙을 15~18㎝ 두께로 다졌다. 동쪽 구석에서는 지름 60㎝ 내외의 둥근꼴의 불땐자리가 길이 40㎝ 내외의 네모난 돌 2개에 둘러싸여 있는 채로 확인되었다. 출입구나 기둥자리 등의 흔적은 후대의 경작 과정에서 크게 훼손되어 확인할 수 없었다. 집터의 면적은 대략 11.7㎡에 달하여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집터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크기이며, 4인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적합하다. 집터 바닥을 진흙으로 다진 모습이나 네모꼴을 띤 것 등은 여주 흔암리의 집터와 유사하다.
2호 집터는 크기가 5×3.2m 정도 되는 네모꼴의 움집 모양이다. 1호 집터와 같이 진흙을 20~25㎝ 두께로 깔아 판축하였다. 원형이 심하게 파괴되어 제 위치에 있는 유물이 거의 없었다. 3호 집터는 현 표토 아래 30~35㎝ 깊이 되는 지점에서 확인되었다. 크기는 8.7×4.4m로 장축이 동서 방향인 긴 네모꼴 집터이다. 집터의 내부에서는 불땐자리 흔적이 두 곳에서 발견되었다. 동쪽 부분에서 중앙쪽에 걸쳐 있는 지름 1.5m 크기의 흔적과 서쪽 중앙쪽에 걸쳐 있는 거의 같은 크기의 흔적이 있다. 이 집터에 거주하는 동안 불땐자리의 장소를 바꿔가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돌널무덤 1호는 42.5×19×16㎝ 크기로 네 면을 화강암 판석으로 만든 장방형의 매우 작은 규모이다. 화강암을 2~3㎝ 두께로 거칠게 다듬은 판석으로 4벽을 이루고 바닥에도 한 장의 판석을 깔아 만들었다. 2호 돌널무덤은 판석을 사용한 전형적 돌널무덤과는 달리 하천석을 사용하여 작은 사각형의 관을 만들었다. 크기는 길이 75㎝, 너비 55㎝ 정도로 긴 네모꼴이다. 3호 돌널무덤은 지름 80㎝ 가량의 돌무더기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납작한 하천석 9개로 70×50㎝ 크기의 네모꼴 돌널을 만들었다. 돌널 내부의 토양은 암갈색으로 주위의 토양과 구분되며, 유기물이 함유되어 있었으나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2호 돌널무덤과 3호 돌널무덤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나, 1호 돌널무덤과는 형식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의 원인이 조성 시기 또는 주민 구성에 있는 것인지는 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고인돌은 덮개돌의 크기가 178×176×35㎝인 정사각형의 판석으로 거의 수평으로 놓여 있다. 무덤방은 구덩식이며, 묻는 방법은 주검을 놓고 그 위에 모난 돌과 냇 돌을 깔고 가장자리에는 큰 돌을 놓아 구획하였다. 청동기시대 후기의 고인돌로 돌을 쌓은 방법과 구덩이 주위에 배치된 열석(列石)의 존재가 특이하다.
2) 초기철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은 돌무지무덤 6기가 있다. 무덤의 축조 방식은 비교적 얕은 구덩이를 파서 진흙을 깔아 판축한 후 묘곽을 설정하여 관을 설치하고, 그 위에 흙을 덮은 후 다시 위에 하천석을 쌓아 올렸다. 부장품은 많이 넣지 않았다. 이러한 돌무지무덤은 발견된 예가 극히 드문 초기철기시대의 분묘로 충주댐 수몰 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로 지동리 유적에서 6기만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1호분은 남북 200㎝, 동서 45㎝의 크기로 판축한 묘곽 바닥을 설치하고, 15~20㎝ 두께로 진흙을 깐 후 다시 관을 설치하고 매장하였다. 다시 관을 흙으로 덮은 후 그 위에 돌을 쌓고 화살촉 등을 안치한 후 완전히 흙으로 봉분한 구조로 짐작된다. 2호분은 판축한 묘곽 바닥의 크기가 남북 2.2m, 동서 1.2m이며, 매장법은 1호분과 같다. 다만, 형태상으로 구덩이의 벽면을 강화하기 위해 몇 개의 큰 판석을 세워 벽면을 보강한 점이 차이가 난다.
3호분은 돌무지 밑에 역시 25㎝ 내외의 두께로 진흙을 깔아 판축한 묘곽이 있으며, 묘곽의 크기는 220×135㎝이다. 무덤의 형식은 1호분, 2호분과 같으나, 많은 하천석을 사용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4호분은 진흙으로 된 묘곽 바닥이 없으며, 비교적 넓게 파놓은 구덩이 흔적만 확인된다. 구덩이는 남북 방향의 장축으로 규모는 길이 2.6m, 폭 1.6m로 비교적 넓다. 무덤의 축조는 구덩이를 판 후 매장을 하고 다시 흙을 덮은 후 그 위에 돌을 쌓았다.
5호분과 6호분은 2차년도 발굴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5호분은 평면 장방형으로 장축은 동서-서북 방향이며, 구덩이의 크기는 220×65×42~50㎝이다. 구덩이 주변을 둘러싼 열석들이 안으로 약 10° 가량 기울어져 발견되었다. 6호분은 5호분과 비슷한 크기이나, 교란이 심해 유구의 하부 구조를 확인할 수 없었다.
[출토유물]
신석기시대의 집터 내에서 빗살무늬 토기편 5점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4점은 점토에 운모가 섞인 것이며, 1점은 고운 모래질 점토이다. 명서리 유적의 토기처럼 내면과 외면에 빗질 흔적이 뚜렷하며, 생선뼈무늬·빗금무늬·사선문 등의 문양이 보인다.
청동기시대의 1호 집터에서는 간돌칼 조각, 구멍무늬 토기, 민무늬 토기 바닥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2호 집터에서는 집터의 동쪽 벽에서 구멍무늬 토기와 간돌칼 조각이, 서쪽 벽에서는 민무늬 토기 조각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미완성의 반달돌칼과 돌화살촉, 석기 제작용 갈돌과 붉은칠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3호 집터에서는 중심부에서 붉은칠 토기 조각, 돌화살촉, 민무늬 토기, 간돌끌, 반달돌칼, 숫돌, 그물추 등이 넓게 퍼져 발견되었다. 서쪽 벽 근처에서는 돌도끼가 1점 발견되었으며, 불땐자리 근처에서는 석기를 제작하기 위한 석재들이 상당수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의 돌널무덤과 고인돌에서는 아무런 유물도 출토되지 않았다.
초기철기시대의 1호 돌무지무덤에서는 적석 상부에서 철화살촉, 진흙 바닥에서 김해식의 타날된 회색 토기의 입술부와 몸체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2호 돌무지무덤에서는 김해식 회색 토기 조각과 발형 토기 조각 등이 다수 발견되었다. 3호 돌무지무덤에서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철기 조각이 수습되었으며, 김해식 회색 토기 조각이 발굴되었다. 5호 돌무지무덤에서는 두드림무늬의 김해식 회색 토기 조각 6점과 그물추 2점이 확인되었다. 4호 돌무지무덤과 6호 돌무지무덤에서는 확인된 유물이 없었다.
[의의와 평가]
지동리 유적은 충주댐 문화 유적 조사 당시 선사시대 전 기간의 유구가 확인되어 크게 주목된 유적이다. 2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로 전체 유구의 성격을 확인하기는 부족한 점이 있다. 지동리 A지구 유적은 중부 지방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많은 자료를 제공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