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7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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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州高句麗碑 |
영어의미역 | Chungju Goguryeo Stel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280-1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병구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1년 3월 18일 - 충주 고구려비 국보 제205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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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충주 고구려비 국보 재지정 |
성격 | 비 |
양식 | 4면비 |
건립시기/일시 | 삼국시대 |
관련인물 | 장수왕|개로왕|동이매금 |
재질 | 화강암 |
높이 | 144㎝ |
너비 | 55㎝ |
소재지 주소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280-11 |
문화재 지정번호 | 국보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밝힌 비.
[개설]
중앙탑면은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많은 문화 유적이 있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던 지역이다. 특히 고대의 왕실이나 최고 지배층을 연상할 수 있는 지명을 상당수 찾아볼 수 있어 주목되는데, 용전리, 봉황리(鳳凰里), 천룡산(天龍山), 을궁산(乙宮山), 태자뜰[太子坪]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충주 고구려비는 자연석의 형태를 그대로 이용해 면을 다듬어 비문을 새겼는데, 현재 글자가 가장 많이 보이는 면을 앞면으로 볼 때에 앞면과 왼쪽 면에 글자가 많고, 오른쪽 면에서도 임자(壬子), 벌(伐), 불(不), 소(小), 중(衆), 공(公), 사(使), 소(少) 등의 글자를 확인할 수 있다.
비의 건립 시기와 목적은,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통구 지방에 광개토왕비를 건립한 것과 같이 문자왕(文咨王) 때 장수왕이 남하 정책을 펼쳐 새로 얻은 지역 안에 [중원(中原)] 조왕(祖王)인 장수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반면 ‘대왕국토(大王國土)’ ‘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의 판도와 신라의 국경 문제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척경비, 또는 정계비(定界碑)로 추정되기도 한다.
[건립경위]
충주 고구려비의 건립 연대는 비 앞면 상부의 ‘건흥4(建興四)’라는 문자에 준하여 추정하기에는 약간 무리일 듯싶으며 ‘고려대왕 조왕(祖王)’으로 보았을 때 앞면 첫 행의 ‘신라매금 세세위원여형여제상하(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上下)’ 운운하는 점과 4행의 ‘사매금지의복(賜寐錦之衣服)’ 등을 보아 장수왕 20년대 이전의 고구려, 신라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면 끝 행에 보이는 ‘개로(盖盧)’를 백제 개로왕(蓋鹵王)으로 본다면 또 곤란한 문제가 생기므로 비의 왼쪽 면 3행에서 보이는 ‘신유년(辛酉年)’과 앞면 7행의 ‘12월 23일 갑인(十二月 卄三日 甲寅)’ 등 연월일을 통해서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장수왕 대에서 신유년에 해당되는 시기는 421년(장수왕 9), 481년(장수왕 69)이므로 비문 첫머리의 우호 관계를 본다면 421년이 될 것이고, 개로(盖盧)를 개로왕으로 본다면 후자에 해당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변태섭 교수는 장수왕 대를 전후하여 12월 23일의 일진이 갑인이었던 해가 449년(장수왕 37), 480년(장수왕 68), 506년(문자왕 15)이므로 앞의 신유년(481)과 연결해 볼 때 480년(장수왕 68)이 주목되며, 이 해에 비문의 내용, 즉 신라 매금(신라왕)이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의복 등을 하사받고 신라토내중인(新羅土內衆人)을 환급받았으며, 다음해인 신유년(481)에 위 사실을 기록한 비가 건립되었다고 추정하였다.
[위치]
충주시청을 중심으로 지방도 520호선을 따라 서북 방향으로 약 12㎞ 정도 가면 노은면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타난다. 삼거리 초입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 어귀에 충주 고구려비가 자리하고 있다.
[형태]
충주 고구려비의 발견, 조사 과정에 참여했던 학자들 대부분이 비의 형태가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의 형태와 유사한 점을 들어 4면비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앞, 왼쪽, 오른쪽 면의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인데 유독 뒷면만이 심하게 마멸되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3면비일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원래 비가 위치하던 방향이나 풍우 등을 고려해야 할 것이며, 3면비였다면 넓은 면을 두고서 폭이 좁은 좌우 면에 굳이 각자(刻字)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 이 비는 원래 4면비였을 것이며, 현재의 뒷면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풍우에 마멸되었거나 인위적인 훼손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어느 면이 1면이 되느냐에 대해서는(편의상 현재 글자가 가장 많이 있는 면을 앞면이라 하겠음) 앞면 상단에 횡서(橫書)가 몇 자 있다고 보아서 [액자(額字)로 추정하나 불분명함] 1면이 된다는 견해가 있고, 가장 넓고 번듯한 데 ‘5월중고려대왕(五月中高麗大王)……’이라는 것이 문장의 주문(主文)격이 될 것이므로 1면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일부에서는 왼쪽 면의 끝부분에 6자 정도의 공간이 있으므로, 여기서 비문이 끝난 것으로 보아 거꾸로 계산하여 현재의 앞면이 3면이 되고, 그 오른쪽 면이 2면, 글자가 보이지 않는 뒷면이 제1면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며, 광개토대왕 비 역시 가장 넓은 면이 제3면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므로 뒷면을 1면이라 주장한다.
[금석문]
3~5㎝의 고졸한 해서체로 음기되었으나 마모되어 정확한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다.
[현황]
1981년 3월 18일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면서 비각을 세우고 작은 공간의 주차장이 마련되었으나 인근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에 비하여 상당히 부족한 느낌이다. 주변을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충주 장미산성, 충주박물관과 연계된 역사 탐방지로 개발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되며, 충주 고구려비 자체에 대한 안내 시설과 고대의 지역적 특수성을 알 수 있는 체험적 시설이 부실하므로 이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보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충주 고구려비의 발견으로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다음과 같다. 신라가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보호를 받고 성장했다는 학설은 이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신라의 종주국 위치에 있었음은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신라를 지칭할 때 ‘동이’라고 한 것과 신라의 왕을 ‘매금(寐錦)’이라고 하여 열등국으로 표기하였다.
둘째, 여형여제(如兄如弟)란 형제 관계 내지 상하 관계를 말하는데, 고구려가 신라 매금에게 의복 같은 선물을 하사했다는 점이다.
셋째, 신라 내에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는 신라 내에 파견된 고구려의 당주였을 것이고, 그가 고구려인인 ‘하부발위사자□노(下部拔位使者□奴)’라는 데서 알 수 있다.
한편 고구려 문화가 신라 문화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불교 전파 과정에서도 알 수 있지만, 사물 관계의 문구 중에서 ‘절사(節賜)’, ‘절교사(節敎賜)’ 등의 용어는 이두로서 신라의 이두(吏讀)가 고구려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추정된다.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 신라 양국간의 정치적 관계 속에서 세워졌지만 물물 교환, 문화 교류 등이 빈번했고, 당주(幢主), 도사(道使) 같은 직명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구려 문화가 신라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한반도 최고(最古)의 금석문이라 하겠다. 또한 충주 고구려비가 현재의 위치에 건립되었다는 것은 이곳이 고구려 남방 경략의 요충지였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