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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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家源 |
영어음역 | Yi Gawon |
이칭/별칭 | 참연(慙淵),연민(淵民)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유호일 |
[정의]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이자 교육자.
[개설]
이가원은 한국 한문학계의 태두이며 동양의 고전과 우리 학문의 기초를 확립한 학자이다.
[활동사항]
이가원은 이황의 14세손으로 어려서부터 도산서원에서 훈장을 하던 조부 및 집안의 한학자로부터 학문을 배워 초년에 이미 한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1941년에서 1943년까지 명륜전문학원 연구과와 명륜전문학교 경학연구과를 마쳤다. 위당 정인보(鄭寅普), 육당 최남선(崔南善), 벽초 홍명희(洪命熹) 등과 교유하며 청년 문장가로 이름을 알렸다.
1952년 성균관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1954년 같은 대학 문리대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1956년 성균관대학교 재직 중 자유당의 부정에 노골적으로 항거하는 학자라는 이유로 총장이던 김창숙(金昌淑)과 함께 파면되었다. 1959년 연세대 부총장이던 외솔 최현배(崔鉉培)의 추천으로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취임하여 1982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23년 동안 재직하였다.
1959년에는 문교부국어심의회 위원을 지냈으며, 1960년에는 한국교수협회 간사를 지냈다. 1962년에는 한국어문학회 이사를 지냈고, 1966년에는 성균관대학교 이사를 지냈다. 1970년부터 1974년까지 유도회총본부 위원장을 지냈고, 1975년 한국한문학연구회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1978년 퇴계학연구원 이사를 지냈다. 퇴직한 후에는 1983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초대 교수를 거쳐 석좌교수에 올랐고,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을 지냈다.
이가원은 학술, 종친, 유교 단체의 장을 역임한 적은 있으나 행정 관료 등을 맡은 일이 없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실학자 박지원의 문학세계를 조명하였으며, 『금오신화』, 『구운몽』, 『춘향전』, 『열하일기』 등 수많은 작품의 역주를 하여 한국 고전문학의 기반을 다졌으며, 1995년 고령의 나이에 『조선문학사』를 집필하여 우리나라 문학사를 집대성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선현과 서예 대가들의 필법을 두루 익혀 서예에도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하였으며, 선현들의 묵적, 골동, 서화 등에 대한 식견과 수집에 대한 관심이 높아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보물급 문화 유적을 많이 소장하였다. 그러나 평소에도 개인 소유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고, 1986년 그동안 애써 모은 박지원의 『열하일기』원본, 정선의 산수화 등 3만여 점의 골동품과 서화를 단국대학교 부설 퇴계학연구소에 기증했다. 2000년에 별세하였다.
[저술 및 작품]
명륜전문학원 재학시절 사서연구회를 만들어 『삼국유사 신역』을 펴냈고, 1956년에는 국립도서관에서 실학에 관한 자료를 찾아 자료집 『실학연구지자』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1965년 출간한 『연암소설연구』는 박지원 소설의 사회적 배경과 문학관을 10여 년 동안 연구하여 4년 동안 집필한 끝에 펴낸 책이다.
1986년에 정음사에서 『이가원전집』22권이 출간되었고, 만년에는 평생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풍부한 자료와 해박한 식견으로 우리나라 문학사를 집대성한 『조선문학사』 3권을 저술하였다. 이 외에 대표적인 저술은 『중국문학사조사』, 『한문신강』, 『한국한문학사』, 『연연야사재문고』, 『열하일기』, 『한문학연구』, 『옥류산장시화』, 『연민국학산고』 등이 있다. 연구논문으로는 「정과정곡 연구」, 「춘향전 소철」, 「석북문학 연구」, 「한문문체연구」, 「호질 연구」, 「이조시대의 한시」, 「유가사상과 한국문학」, 「훈민정음의 창제」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한국 한문학의 연구의 공로를 인정받아 1982년에 국민훈장 동백장이 추서되었고, 1987년에는 성곡문화재단에서 수여하는 성곡학술상을 받았다. 1992년에는 춘향학술상을 수상하였고, 1997년에는 용재학술상과 춘강상을 수상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