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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1473
한자 徐相庚
영어음역 Seo Sanggye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구완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충청북도 충주시 이류면
성별
생년 1900년연표보기
몰년 1962년연표보기
본관 대구
대표경력 흑기연맹 회원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대구(大邱). 할아버지는 서회보(徐晦輔)이며, 아버지는 서중순(徐重淳)이다.

[활동사항]

서상경은 청주농업학교에 다니던 중에 3·1운동에 가담하여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등사하여 배포하다 체포되어 5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이강하, 이윤희 등의 아나키스트들과 접촉하면서 고향인 충주에서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시기에 이미 인간의 절대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며 민족해방투쟁을 각국의 피압박계급이 연대하여 투쟁하는 피압박계급해방투쟁의 형태로 전개해야 한다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깊이 공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23년 초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稻田大學]에서 고학으로 야간부를 다니면서 아나키즘 운동에 참여했다. 박열(朴烈) 등의 동지와 함께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고,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하여 잡지 『흑도(黑濤)』의 발행에도 참여하면서 제국주의 논리와 민족주의 및 공산주의를 비판하였다. 아울러 니가타[新潟]현의 댐 공사장에서 일어난 한국인 노동자 집단학살 사건을 규탄하는 연설회 등에 참여하다가 1923년 9월의 관동 대지진 때에 ‘대역사건’으로 체포되었고, 10개월만에야 보석으로 출옥했다.

귀국 후에는 고향에서 정진복, 서천순, 이선규 등과 함께 청년회 운동에 참여하여 문화운동을 표방하는 듯했지만, 아나키즘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1925년 1월에 충주에서 서정기 등 3명의 동지와 회합하고, 서울에서 무정부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흑기연맹(黑旗聯盟)’을 조직하여 무정부주의 연구와 선전활동에 가담하였다. 이후 제국주의 논리와 민족주의 및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에 힘쓰다가 또다시 체포되어 「제령(制令) 7호」 위반으로 1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문예운동을 통하여 아나키즘을 고취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29년 2월 18일에 충주 읍내 정운자(鄭雲慈)의 집(금성여관)에서 권오순, 안동규, 김학원, 정진복, 서정기, 김현국 등과 함께 ‘문예운동사’를 조직했고, 이후 잡지 『문예운동』의 간행을 꾀하다가 검거되었는데,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했으며, 만기 출소 후에는 고향인 충주에서 동아일보 충주지사의 기자로 있으면서 농민운동을 했다.

[상훈과 추모]

사후인 1977년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1990년 대한민국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11.18 [활동 사항] 수정 및 보완 원 집필자가 보내온 원고 내용으로 [활동 사항] 내용 추가 및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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