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2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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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丙寅迫害 |
영어의미역 | Byeongin Persecution |
이칭/별칭 | 병인교난,병인사옥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동근 |
[정의]
1866년(고종 3) 충청북도 충주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사건.
[역사적 배경]
1800년대 중반 조선의 주변 정세는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하고 러시아가 남하 정책을 펴며 두만강 국경 지대를 수시로 침범할 만큼 혼란스러웠다. 1864년(고종 1) 러시아인들이 함경도 경흥부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자 미처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던 흥선대원군 이하 정부 요인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병인박해는 서양 세력의 조선 침입에 대한 위정자들의 위기의식이 발단이 되었다. 조선에 와 있던 몇몇 천주교도들이 대원군에게 조선과 프랑스, 영국이 삼국동맹을 체결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건의하면서 대원군에게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천주교가 부인 민씨가 믿는 종교이기도 하여 천주교에 대해 별 감정이 없었으므로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하였던 사람의 하나로 충주 출신 남종삼(南鐘三)[1817~1866]이 있었다.
그러나 지방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로 돌아왔을 때에는 시일이 한참 지난 터라 조정에서는 러시아인의 국경 침범과 통상 요구가 지나친 걱정이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삼국동맹이 체결되면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선교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그들은 어리석음과 무책임한 주선으로 비난을 받게 된다.
[경과]
천주교도들이 늘어나자 보수층의 반발이 심해져 갔다. 천주교를 서학(西學)이니 사학(邪學)이니 하여 배척하였고, “운현궁에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으며, 신정왕후와 정부 고관들도 천주교도를 비난하고 나섰다. 1865년 11월 때마침 조정 대신들은 북경에 간 사신으로부터 10년 넘게 천주교도와 서양인들을 살육한 태평천국의 난 소식을 전해 듣고 자극을 받아 흥선대원군을 압박하여 박해령에 서명하도록 하였다. 갈수록 심해지는 서구 열강의 침략도 천주교 탄압의 한 원인이 되었다.
1866년 천주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한 것을 시작으로 불과 수개월 사이에 천주교도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세 명의 프랑스 신부의 행방을 찾고 있었고, 이 사건으로 산속에 피신하여 쫓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려 죽은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1866년 2월 고향인 충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남종삼은 중도에서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몸을 피하였으나 2월 25일 체포되어 같은 해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다.
[결과]
탈출에 성공한 프랑스인 리델 신부가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의의와 평가]
천주교회는 병인박해 순교자를 대략 8,000명에서 1만 명으로 추산한다. 이들 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들이며,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 24명만이 1968년 시복된 이후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