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3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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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省齋集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단행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47-5[중앙탑길 112-2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봉희 |
성격 | 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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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유중교 |
저술연도/일시 | 1882년 |
책수 | 1책 |
사용활자 | 필사본 |
가로 | 15.4㎝ |
세로 | 23.2㎝ |
표제 | 성재집 약초(省齋集 略抄) |
소장처 | 충주박물관 |
소장처 주소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47-5[중앙탑길 112-28]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충주박물관에 있는 조선 말기 문신 유중교의 문집초.
[개설]
유중교가 관직을 사양하고 경기도 가평에 있는 옥계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면서 지은 책이다. 1882년에 만들어진 문집초략으로 주된 내용은 유학과 관련된 것이다. 유중교(柳重敎)[1832~1893]의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호는 성재로 김평묵(金平黙)과 함께 이항로(李恒老)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76년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제수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고, 1881년 척사위정의 소론(疏論)이 일어나자 춘추의리론(春秋義理論)을 기반으로 구법보수(舊法保守)와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주장하였다. 1882년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가평의 옥계(玉溪)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한말의 사회적 동요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유학의 학문적 심화와 체계적 정립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편찬/발간경위]
유학의 체계적 정리 등 학문 연구에 전념하면서 꾸준히 정진하려는 의도에서 발간된 책으로,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 학문적 정도를 걸어야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보인다.
[서지적 상황]
1882년 지금의 경기도 가평군 용추계곡에 들어간 직후 쓴 책으로, 후에 유중교 선생 시문집인 『성재집』의 초안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재집』은 목활자본으로, 1897년 문인 유치경(兪致慶)과 주용규(朱庸奎)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시(詩)·사(詞)·서(書)·설(說)·논(論) 등으로 나누어져 총 51권 2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충주박물관에는 금속활자본의 『성재집』이 있는데, 이는 유중교의 전집 중 36권에 해당된다.
[형태]
선장(線裝)으로서 가장 보편적인 오침안정법(五針眼訂法)이며 광곽(匡廓)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이다. 판심(板心)에는 접지표가 하나 표시되어 있고, 접지표 위로는 각 글의 제목을 적고 판심 중간 아래쪽에는 매수를 기록하고 있다. 계선(界線)이 있으며 각 면의 행은 10행으로 20자 정도씩 쓰고 있다. 간혹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기록한 부분도 있다.
[구성/내용]
성재집의 첫 장 첫 행에는 표제를 쓰고, 다음 행부터 ‘문행충신설(文行忠信說)’이라는 제목으로 본론에 들어갔는데 문행충신을 사교(四敎)라 하며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삼강오상설(三綱五常說)’, ‘정통론(正統論)’, ‘묘축용영력기년설(廟祝用永曆紀年說)’, ‘허충정법론(許衝正法論)’ 등 당시 정치상황과 관련되어 유교적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유씨가전(柳氏家典)’이라 하여 정륜리(正倫理)·봉선(奉先)·사친(事親)·어가(御家)·거향(居鄕) 5가지로 나누어 가문과 가정에서의 유교적 덕목을 세세히 설명하였다. 맨 끝부분에는 ‘옥계조(玉溪操)’가 있다. 옥계조가 가평(加平) 화악산(華岳山) 아래 있음을 밝히고 시(詩)를 지었는데, 국한문 혼용체이다. 내용은 유중교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하는 것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천 자양영당에 있는 ‘자양금’도 유중교가 사용했던 거문고라고 한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후기 일본과 서양세력의 침투 등 당시 어렵던 시대적 상황 아래 학문에 전념하면서 지은 책으로 유학 학문을 접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