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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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大邱- 公園-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주연 |
[정의]
대구광역시의 역사를 대변하면서도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는 공원들.
[개설]
쉬며 놀며 걸으며 건강과 휴양까지 챙겨 주는 공공장소가 공원 이외에 또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공원이 많다는 것은 그 도시의 품위를 말해 줄 수 있다. 대구광역시민 누구나 즐겨 찾는 공원 여섯 곳은 하나같이 대구가 지나온 풍파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대구 사람들이 어릴 때 소풍을 간 곳도, 아이가 자라 데리고 나간 곳도, 노년기에 앉아 쉬는 곳도 대구의 공원들이기에 한 개인의 역사로 보아도 중요한 장소임은 분명하다.
가령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의 달성공원은 달구벌토성, 대구향토역사관, 동물원, 관풍루, 최제우 동상, 달성서씨 유허비, 어린이 헌장비 등을 간직하고 있어 고대에서 현대까지를 아우르고 있으며 아이에서 어른까지 누구나 좋아하는 공원이다. 또한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의 경상감영공원은 이름 그대로 조선시대 경상감영이 있었던 곳이고, 선화당, 징청각이 세워져 있으며, 통일종각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하며 대구광역시민들의 염원을 담아내고 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은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에 있는데, 달구벌대종 덕분에 더욱 유명하다. 도서관과 영상시설, 화합의 광장, 명언의 오솔길, 국채보상운동기념관 등을 갖추고 있어 일제의 억압에 맞섰던 대구 사람들이 지금도 결집할 수 있게 만들어진 장소다. 민주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2·28기념중앙공원은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동에 있기에 동성로를 찾는 시민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중앙분수, 실개천, 청소년광장 등이 마련되었다.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의 앞산공원에는 낙동강승전기념관, 충혼탑, 안일사, 은적사, 앞산케이블카, 승마장, 심신수련장 등이 있어 대구 시민들이 역사의식 고취와 체력 단련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장소다. 마지막으로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당동의 두류공원은 야외공연장, 대구문화예술회관, 관광정보센터, 도서관, 이월드, 두류공원 인물동산, 대구 두류야구장, 두류수영장, 유도관, 두류테니스장 등을 갖추고 있어 돗자리를 든 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이름나 있다.
[달성공원, 대구 사람과 함께 나이 들어 가는 곳]
대구에서 사자, 호랑이, 코끼리, 공작새, 사슴, 타조, 물개를 보려면 달성공원으로 가야 한다. 마침 대구도시철도 3호선 달성공원역 3번 출구에서 가깝기에 공원을 찾는 시민들은 더욱 간편히 애용할 수 있다. 더군다나 동물사가 있어 가족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달성공원의 토성인 ‘대구 달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한국에서 원형 보존이 가장 잘된 토성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삼국시대 성이니 2,000년의 역사가 깃든 셈이다. 대구 달성은 평지의 낮은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삼국시대에 쌓아올린 토성이다. 높이는 4m 정도, 둘레는 약 1.3㎞이고, 면적이 10만 5238.5㎡에 달한다. 문화재청의 설명에 따르면 달성의 성벽 아래에서 조개더미를 비롯 초기 철기시대의 각종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시 대구 지역의 중심 세력이 초기 국가 형태를 이룬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대구 달성은 우리나라 남부 지방 초기 성곽의 전형으로 여겨지므로 성곽 발달사에 있어 가장 이른 시기의 형식으로 분류된다. 대구 달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온다. “신라 첨해이사금 15년(261)에 달벌성을 쌓고 나마 극종(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라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는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기원전 무렵부터는 대구의 어원이 되는 달구벌국이 성립되었던 대구의 중심지였다. 삼국시대가 되면 신라의 영향으로 달성고분군과 같은 큰 규모의 고분문화가 전해졌다. 달성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을 보면 당시 달성 지역에 존재하였던 세력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달성고분군 37호분 금동관은 현재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에 있는 국립대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나무가 빽빽이 우거진 성곽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고대 달구벌의 세찬 기운이 전달될 정도로 역사의 흔적을 품은 달성공원은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도심 공원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 토성의 길이를 ‘451걸음’이라 하였으므로 30분간 실제로 걸으며 확인하여 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달성은 대구의 대표적인 가문 달성서씨의 세거지였기에 달성서씨 유허비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 초 달성서씨가 남긴 미담이 전하고 있다. 세종대왕 시절 달성서씨의 땅이었던 달성 지역이 관아의 부지로 결정되었는데 나라에 헌납하고 포상을 받으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에 달성서씨 종손인 구계 서침은 포상 대신 대구 사람들의 환곡을 감하여 달라고 청하여 노블레스오블리주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대구 사람들은 서침의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달성공원의 회화나무에 ‘서침나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다.
넓은 잔디광장과 조경수가 아름답게 조성된 달성공원에는 옛 경상감영의 정문 누각인 관풍루도 있다. 지방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어 대구가 영남의 중심이던 시절을 대변해 준다. 달성공원에는 슬픈 역사의 흔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주둔지로 쓰인 달성에는 일본신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때부터 달성을 눈여겨봐 온 일본은 결국 1905년(고종 42), 달성을 공원으로 만들고, 1906년(고종 43)에는 메이지 일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황대신궁 요배전’을 세웠다. 급기야 일제강점기이던 1914년에는 달성공원에 대구신사까지 들어선 것이다. 이에 저항이라도 하듯 달성공원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인 민족시인 이상화의 시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완용의 회유를 뿌리치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왕산 허위, 석주 이상룡의 뜻을 기리는 비석도 있기에 항일운동의 기록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 또 동학의 창시자이자 대구에서 처형당한 수운 최제우의 동상이 순교 100주년이던 1964년에 건립되기도 하였다.
봄이면 비둘기에게 과자를 주며 소풍을 즐기는 어린이들과 시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달성공원은 입장료가 무료인데다 연중무휴이므로 언제든 천천히 산책하며 쉬어 가기 좋다. 곳곳에 벤치와 휴식 공간이 많으며 공원 둘레를 한 바퀴 도는 오솔길이 조성되어 있고 대구향토역사관 등이 있어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하다. 달성공원 인근 마을 또한 근대 모습 그대로 보존된 골목길, 오래된 주택들이 재발견되면서 ‘달성과 함께하는 행복마을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달성공원 서편 탐방로 조성 사업도 진행되고 있다.
[경상감영공원, 대구가 영남의 중심임을 알리는 곳]
도심 한복판에서 숲과 정원을 거닐며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공원이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에 있는 경상감영공원은 대구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4번 출구에서 300m 떨어져 있어 접근하기 편하다. 이름 그대로 경상감영이 있던 자리에 조성된 경상감영공원은 현재 약 1만 6500㎡의 크기이다. 풍수지리에 밝았던 두사충은 경상감영이 세워지기도 전에 터 주변 지세를 보고 “여기는 하루에 천 냥 나오는 자리다”라고 말하며 길지임을 밝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601년(선조 34) 한음 이덕형의 제안으로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졌다.
경상도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은 국가지정 보물로, 처소로 사용한 징청각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각각 지정된 바 있어 대구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며 역사 공부도 할 수 있는 곳이다. 백성을 위하여 뜻을 펼친 관찰사를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운 선정비가 29개 있는가 하면 또 국보로 지정된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일명 영영(嶺營) 측우대], ‘절도사이하개하마비(節度使以下皆下馬碑)’ 표지석 등이 있다. 또한 옛 건물의 멋을 보여주는 정문, 분수, 돌담, 산책로, 통일을 기원하는 ‘통일의 종’ 등을 볼 수 있다.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은 대구 경상감영지는 201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상감영이 있는 곳은 명실상부한 경상도의 중심을 의미하므로 역사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실제로 대구는 임진왜란 이후 큰 도시로 성장하였으며, 1896년(고종 33) 우리나라의 지방 행정을 13도제로 개편한 이후에도 경상북도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1906년 대구읍성이 헐린 후, 경상감영의 정문 누각 관풍루(觀風樓)는 달성토성으로 옮겨졌다. 현재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감영은 1910년부터 1965년까지 경상북도 도청사로 쓰이다가 1966년 경북도청이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에서 북구 산격동으로 옮겨간 이후인 1970년, 대구시가 ‘중앙공원’으로 개장하였다. 1997년 들어 담장을 허물어 공원 전체를 재조성하고 명칭 또한 ‘경상감영공원’으로 변경하였다. 푸른 숲에 둘러싸여 쉬어가기 좋은 경상감영공원은 인근에 향촌문화관, 대구근대역사관, 동성로, 북성로 등 대구 명소들과도 가까워 도심 속 정원으로 여길 만한 곳이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의리의 상징 도시 대구를 말하는 곳]
한 해가 바뀜을 알려 주는 타종행사 현장은 늘 붐빈다. 매년 대구광역시의 첫 날을 알리는 제야의 종은 22.5톤 무게의 묵직한 달구벌대종으로 울린다. 달구벌대종은 바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있다. 대구에서 처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일본에 진 빚 1300만 원을 갚아 국권을 지키자며 의로운 보부상 서상돈(徐相敦)[1851~1913]이 발의한 경제 주권 회복 운동이다. 국채보상운동의 주창자로 잘 알려진 서상돈은 낙동강을 주 무대로 하여 쌀, 소금, 베, 창호지, 기름 등을 실어 나르면서 부산에서 안동까지 800리 길을 누빈 보부상이었다. 큰 부자가 된 서상돈은 부의 축적에 그치지 않고 자선, 구제, 교육 등 다방면에 참여하였다. 서상돈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의 주역으로 잘 알려져 있는 김광제[1866~1920]는 일제의 행태에 분노하여 동래 경무관 관직을 사임하고, 1906년 1월 대구로 내려가서 광문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김광제는 외국의 신학문을 도입하고 실학자들의 저술을 번역·편찬하여 민족의 자강의식을 고양하고 나아가서는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1907년 1월 29일 국채보상운동의 시발점이 된 서상돈의 발의가 끝나자 김광제가 발기 연설을 마쳤고 국채보상운동을 당장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광제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담뱃대를 버리고 3개월 치 담배 값 60전과 의연금으로 10원을 내었다. 이에 청중들이 동참하여 의연금을 냈고 그 자리에서 2,000여 원이 모금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은 담배를 끊는 ‘3개월 단연’을 주된 방법으로 제시한 남성 중심적 운동이었다. 하지만 여성들도 ‘부인이라고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의미로 의연금을 내기 시작하였다. 여성들이 처음 조직을 만들어 의연금을 내기 시작한 것은 1907년 2월 23일 대구 남일동 부인 7명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국민들의 이러한 실천에 감복한 고종황제 역시 1907년 2월 26일 칙어와 함께 단연보상에 참여하였다. 고종의 단연보상 참여는 국채보상운동을 국가적 차원에서 국민적 의거로 공인한 것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를 시작으로 전국에 있는 모든 계층의 국민들이 국권을 지키기 위해 힘을 합하였다는 것과 아래로부터 위로 전개된 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대구광역시와 국채보상기념사업회는 2015년 3월부터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진행하였다. 100만 인 서명운동, 국회 토론회, 국제학술대회 등을 개최하며 대구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알렸다. 마침내 유네스코(UNESCO)에서 열린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국채보상운동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에 대응하여 가장 앞선 시기에 범국민기부운동을 바탕으로 나랏빚을 갚고자 한 국권수호운동이었다”라는 인정을 받았다. 이로써 발기문과 취지문, 일제가 동향 파악용으로 보관한 보고서, 명령서, 기부영수증, 『대한일보』·『황성신문』 게재 기사 등 2,472건의 기록물이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1,000여 그루의 수목이 심어져 있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는 달구벌대종, 종각, 국채보상운동기념관, 향토 서예가들이 쓴 시비와 대형 영상시설, 명언비가 있는 오솔길, 분수, 화합의 광장 등이 조성되어 있다. 공원의 남쪽에는 대구시립중앙도서관, 서쪽으로는 농구코트 광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특히 야간 명소로 알려진 국채보상로 가로길과 동덕로 가로길은 터널형 가로수 길이어서 연인들이 걷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본래 1982년 도시계획상 ‘동인공원’으로 고시되었다가 도시개발공사가 창사 10주년 기념사업으로 옛 대구여자고등학교 자리에 1998년 3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중구 동인동에 조성한 공원을 그 기반으로 한다. 마침 IMF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진행된 1997년 금모으기 운동이 ‘제2의 국채보상운동’이라며 세간에 오르내리자 대구에서 비롯된 국채보상운동의 시민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11년 10월에는 국비, 시비 그리고 시민들의 모금으로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개관되었다. 기념관 한쪽 벽에는 시민들의 아름다운 동참을 기록한 기부의 벽이 조성되어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네거리와 종각네거리 사이의 4만 2509㎡의 면적의 넓은 잔디광장 주위에 이토록 열렬한 대구의 평화정신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이제 대구 시민들에게는 자부심이 되었다.
[2·28기념중앙공원, 민주화의 성지가 대구임을 보여 주는 곳]
일요일을 맞아 대구광역시의 최고 번화가인 동성로에 나가 보면 시민들의 평화로운 발걸음이 공원에 자주 머문다. 이토록 편안한 일요일을 맞이하기까지 그토록 치열하고 뜨거운 일요일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구는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에 쓰여진 역사 위에서 살아가는 도시다. 그날 대구 학생들은 일요일인데도 학교로 등교하게 되었다. 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張勉) 박사의 선거 연설회에 학생들이 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표출된 것이다. 부당하다고 여긴 학생들은 교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교 밖으로 뛰쳐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유동인구가 가장 많았던 중앙통을 지나며 자유당 정권의 횡포를 규탄하던 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는 등 더욱 강한 억압에 시달리게 되었다. 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반월당 삼성빌딩 앞에는 ‘반월당 집결지’ 표지판이 놓여 있는데 1960년 2월 28일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이 건국 이후 최초로 독재정권에 항거해 민주운동을 일으킨 집결지임을 기념하고 있다. 학생들의 자유조차 앗아간 사건에 언론마저 분노하며 보도하자 마침내 전국의 학생들은 집단행동에 나섰다. 바야흐로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 학생들에 의하여 시작되는 대목이다.
2·28민주화운동은 당시 참여 주체가 고등학생들이었지만, 대구 시민들의 시대정신을 가장 잘 보여 준 반독재 운동의 표출이었다.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에서 4·19혁명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4·19혁명의 모태가 된 2·28운동이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 또한 자연히 설명될 수 있다. 대구광역시는 2·28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공원을 조성하였다. 2·28민주화운동의 주역이었던 대구의 8개 고교학생들의 뜻을 기념하는 공원인 만큼 청소년의 문화와 예술이 살아있는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2·28기념중앙공원에서는 주기적으로 청소년을 위한 행사가 열려 학생들이 건강한 의식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옛 중앙초등학교가 있었던 곳인 2·28기념중앙공원은 2003년 12월, 2·28학생민주의거를 기념하는 차원에서 조성되었다. 대구광역시 중앙로 주변, 도심 한복판에 있는 2·28기념중앙공원은 중앙 분수대, 1,000여 그루의 나무가 조성되어 있어 도심 속 녹색 공간이자 만남의 장소로서 휴식처가 되고 있다.
[앞산공원, 대구의 장엄한 앞마당이 되는 곳]
‘대구광역시 앞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이름붙은 앞산은 해발 660m로 용두골, 고산골, 강당골, 안지랑골, 골안골, 매자골, 달비골 등 크고 작은 골짜기를 품고 있어 트레킹 코스로 적합하다.
앞산공원은 도심에서 5㎞ 이내에 있고 ‘앞산공원 버스정류장’도 있기 때문에 도심생활 중에 언제든 훌쩍 입산할 수 있는 장소다. 앞산공원관리사무소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숲속작은도서관인데 공중전화 부스처럼 생긴 유리온실 안에 어른도 아이도 좋아할 만한 책들이 보물처럼 꽂혀 있다. 잠시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독서를 하고 다음 사람을 위하여 본래 자리에 꽂아두는 데에서 대구 시민들의 품위를 엿볼 수 있다. 그다음으로 발견되는 것은 낙동강승전기념관이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전투 승리를 기념하고 참전 용사를 기리는 의미에서는 총기류 등 전쟁 관련 전시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기념관 곁에는 이호우·이윤수 등 대구 출신 시인들의 시비와 독립운동가 이시영의 순국기념탑도 있다.
이제 왕건의 발자취를 찾아나설 차례다. 앞산공원 곳곳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흔적이 있다. 왕건은 후백제 견훤과 겨룬 927년 공산전투에서 패하여 앞산에 몸을 숨겼다. 당시 왕건이 편안히 머무른 사찰이라는 뜻으로 안일사의 이름이 붙여졌으며 왕이 머무른 동굴은 왕굴로 불린다. 은적사 대웅전 옆 동굴에 3일간 숨어 지낸 것인데 왕의 자취가 숨어 있었다 하여 ‘은적사’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앞산전망대는 대표적인 데이트코스로 여러 드라마에도 등장한 바 있는데 전용 케이블카가 있어 등산을 꺼려하는 이들도 대구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벚나무, 단풍나무, 참나무, 잣나무가 무성한 앞산공원은 도심에서 가까운 삼림욕장이자 산림 문화 휴양 공간이라 일컬어진다. 앞산공원 근처에는 앞산카페거리와 안지랑곱창골목 등이 있어 먹거리촌과 연계된 점이 특징이다. 이름조차 수수한 앞산은 대구시민 누구나에게 우리집 앞의 산처럼 포근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두류공원, 대구의 문화와 예술이 꽃피는 곳]
“좋은 게 좋은 거다." 대구 사람들이 갈등을 겪을 때마다 긍정적인 선택을 권하며 건네는 말이다. 둥글둥글하게 두루두루 잘 살기를 원하는 이러한 성향은 산의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대구광역시 달서구 두류동의 두류산은 대구 사람들의 넉넉함과 여유로움을 함축하고 있다.
두류산 아래의 두류공원은 면적이 165만 3965㎡에 달한다. 이월드와 83타워가 바로 앞에 있으며 대구 두류야구장, 두류도서관, 대구문화예술회관, 두류공원 인물동산, 코오롱야외음악당, 성당못 등 다채로운 시설이 공원을 두르고 있다. 또 수목 200여 종 20만여 본이 꽃을 피운다. 두류공원의 대표 쉼터는 북쪽 코오롱야외음악당의 푸른 잔디밭인데 2000년 두류공원 임업시험장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국내 최대 야외 공연장이다. 개장하던 해에는 기념으로 오페라 「투란도트」가 공연되어 화제를 모았다. 요즘은 대구치맥페스티벌의 중요한 행사장이자, 대구 시민의 평화롭고 한적한 쉼터다. 두류공원은 남쪽 성당못과 대구문화예술회관 덕분에 더욱 다채로운 풍경을 자아낸다. 서거정이 밝힌 대구10경 가운데 5경이 바로 두류공원 남쪽에 있는 성당못으로 추청된다. 또한 1990년 문을 연 이래로 대구의 굵직한 전시와 공연을 담당하고 있는 대구문화예술회관도 두류공원 내에 있다. 이처럼 두류공원은 1965년 공원으로 결정된 이후 1977년부터 개발된 도시 근린공원으로 대구광역시민의 삶과 함께 호흡하는 문화예술 휴식공간이다. 대구도시철도 2호선 두류역과 350m 떨어져 있어 대구광역시 어디에서나 접근하기 쉽고, 2011년 ‘두류공원 경관개선 사업’으로 완공된 오픈 스페이스 광장, TIME POLE 잔디마당, 바닥분수마당, COLORFUL DAEGU 포토존, 관광정보센터 및 솟대광장, 야간경관 조명 등으로 볼거리, 즐길거리 등 다양한 공간으로 재창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