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2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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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商業學校 太極團 |
이칭/별칭 | T.K.D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대구상업학교 학생들이 결성한 항일·독립운동 단체.
[설립 목적]
대구상업학교 태극단(大邱商業學校太極團)은 민족자결 원칙에 따라 당면 최대 목표인 조선의 자주독립을 이룩하고, 세계 인류의 영원한 평화·자유·평등을 실현하고자 결성하였다.
[변천]
대구상업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학생 이상호(李相虎)[1926~1945]는 김상길(金相吉)과 서상교(徐尙敎)에게 태평양전쟁의 전황, 아시아 각 나라의 동향, 일제의 민족 차별, 독립의 필연성 등을 설명하고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펼치자고 제안하였다. 이상호·서상교·김상길은 단명을 태극기를 상징하는 ‘태극단’으로 정하고, 약칭을 ‘T.K.D’라고 하였다.
이후 김정진·김종우·이원현 등이 가입하였고, 대구공업고등학교 윤삼룡과 경북공립중학교[현 경북중고등학교] 최두환도 가입하였다. 약 20여 명 학생이 합류하자 1942년 5월 9일 대구 앞산에서 정식으로 ‘태극단’을 결성하였다.
1943년 5월 23일 한 단원의 밀고로 이상호가 대구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었고, 이상호 집에 숨겨진 태극단 관계 문서가 발각되었다. 1943년 5월 25일 수업 중이던 김상길·서상교·김정진·이준윤·이원현·윤삼룡·정광해·이태원·정완진 등 9명이 체포되었다. 5월 27일 단원과 준단원 16명 등 태극단 단원 26명이 전원 일경에 체포되면서 대구상업학교 태극단은 해체되었다.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근거로 이상호는 단기 5년 이상 장기 10년, 김상길은 단기 5년 이상 장기 7년, 서상교는 단기 4년 이상 장기 7년, 김정진·이원현·윤삼룡은 단기 3년 이상 장기 3년을 선고하였다. 미성년자에 대한 법정 최고형이었다. 이준윤은 조사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아 순국하였고 이원현은 1945년 3월 10일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순국하였다. 이상호 역시 병보석으로 1945년 2월 중순 석방되었으나 12월 9일 순국하였다. 윤삼룡 역시 광복 이후 출옥하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47년 7월 중순 순국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상업학교 태극단은 조직 체계를 일반 조직과 특수 조직으로 구성하고, 최고 의결기관으로 간부회의를 두었다. 일반 조직에는 육성부 아래 관방국·체육국·과학국 등 3국을 두었으며 산하에 군사부·무도부·경기부·등산부·항공부·박물부·이화부 등 10여 개의 부서를 두었다. 이상호가 단장과 체육국장을 맡았고, 김상길이 관방국장·군사부장, 서상교가 무도부장·등산부장, 김정진이 비서장·회계관, 이원현 비서관, 경북공립중학교 최두환이 항공부장을 맡았다. 특수 조직인 건아대(健兒隊)는 중학교 1·2학년생과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상급반 학생들 가운데 민족의식이 높고 실천력과 책임감이 강한 학생들로 조직하였다.
대구상업학교 태극단은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의 무저항 정신과 쑨원[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관한 서적을 윤독(輪讀)하고 사회과학에 관한 연구와 토론을 펼쳤다. 또한 군사 관계 서적 번역, 글라이더에 관한 연구,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 등을 하며 군사학 관련 연구에 정진하였다. 대구상업학교 태극단은 계속 학교 단위로 조직을 확대하며 일제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한 무장 항일투쟁을 준비하였다. 만약 국내 투쟁이 여의치 않을 경우 중국으로 집단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 간다는 계획도 세웠다.
[현황]
대구상원고등학교 총동창회는 2003년 대구상원고등학교 후문 인근에 태극단 학생 독립운동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2003년 10월 19일 태극단 학생 독립운동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대구지방보훈청은 매년 태극단이 결성된 5월 9일에 태극단 학생 독립운동 기념탑 앞에서 대구상원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태극단 학생 독립운동 추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대구상업학교 태극단의 학생 독립운동은 6·25전쟁 등 여러 국내외적 사건에 가려져 한동안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 와서야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과 함께 대표적인 학생 독립운동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