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령시 남성로 이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21
한자 藥令市 南城路 移轉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8년연표보기 - 약령시 경상감영 객사에서 남성로로 이전
성격 도시계획

[정의]

1908년에 대구의 경상감영 객사에서 열리던 약령시를 남성로로 이전하여 설치 운영한 일.

[역사적 배경]

대구 약령시는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인 17세기 중반부터 조정의 영시[대구 약령시의 약칭] 개시 통첩을 통하여 운영되었다. 대구 약령시경상감영 객사에서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보통 각각 10일 정도 열렸다.

을사조약과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대구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대구읍성이 철거되고 대구의 일본인 사회와 경상북도관찰부에 의하여 경상감영 객사를 허물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대구 일본인 거류민단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객사를 무상으로 교부를 받아 허물려 하였고, 경상북도관찰사 박중양은 공소원을 짓는다는 이유를 들어 없애려 하였다. 그 결과 대구 약령시경상감영 객사에서 열릴 수 없게 되었다.

경상감영 객사경상감영의 서북쪽에 위치하였다. 지금의 대안동 일대이다.

[경과]

대구 약령시경상감영 객사가 철거될 때 경상북도관찰부에 의하여 남성로로 이전되었다.

경상감영 객사 철거를 반대하는 대구부민들이 자위대를 조직하여 저항하였음에도 경상북도관찰부는 객사 철거를 강행하고, 약령시를 남성로로 이전시킬 계획이었다. 남성로대구읍성을 허물고 난 뒤 영남제일관을 기준으로 동서 방면의 성벽 자리에 조성된 도로이다.

남성로 일대에 자리 잡은 대구 약령시약전골목이라는 명칭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결과]

경상감영 객사는 대구부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수비대 1대대에 의하여 철거되고 말았다. 그 뒤 약령시는 경상북도관찰부에 의하여 남성로로 옮겨졌다. 약령시의 남성로 이전대구 약령시 상인들은 1909년에 약업입규흥업회, 1910년 대구약상흥업회를 결성하여 영시를 번영시키고자 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 약령시 남성로 이전은 일제의 한국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로써 대구 약령시남성로 시대를 맞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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