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214
한자 達城徐氏
영어공식명칭 Dalseong Seossi|Seo Clan of Dalseong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달성 - 대구광역시
입향지 달성 - 대구광역시
세거|집성지 산격동 -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지도보기
성씨 시조 서진
입향 시조 서진

[정의]

서진을 시조이자 입향조로 하는 대구광역시의 세거 성씨.

[연원]

서씨(徐氏)는 고조선 때 여수기(余守己)가 서씨 성을 하사받은 것에 연원을 두고 있다. 이후 신라 말 고려 초에 서신일(徐神逸)로 이어졌다. 대구에 정착한 것은 고려시대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역임한 서진(徐晉)이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고 달성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것에서 비롯한다. 이후 후손들이 서진을 시조로 삼고, 달성을 본향으로 세계(世系)를 이었다.

[입향 경위]

1424년(세종 6) 달성은 지형이 자연적으로 높은 성벽을 이루고 있어서 군사를 훈련하고 적을 방어할 요새 구축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달성서씨의 세거지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도록 하고 보상책을 논의하였다. 서진의 5세손 서침(徐忱)은 일체의 보상을 사양하는 대신, 고을의 백성들이 납부하는 환곡(還穀)의 이자를 다섯 되씩 줄여 달라고 청하였다고 한다. 세종(世宗)은 서침의 성의를 가상하게 여겨 이를 허락하고 특별히 연신지(蓮信池)[현 영선시장 자리]와 신지(新池)[현 서문시장 자리] 일대의 토지에 대한 조세 수취권은 물론이고 남산고역(南山古驛)[전 남산병원 일대]과 동산(東山)[현 중구 동산동] 일대의 땅을 하사하였다. 이에 달성서씨금호강연암산 사이의 넓은 들[현 북구 산격동]에 자리를 잡고 세거하게 되었다.

[현황]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5년 현재 달성서씨는 40만 7431명으로 조사되었다.

[관련 유적]

대구 지역 달성서씨의 관련 유적으로는 중구 동산동의 구(舊) 구암서원(龜巖書院)북구 산격동의 현 구암서원, 1758년(정조 34)에 세운 구암서원묘정비(龜巖書院廟庭碑)가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동구 도동백원서원(百源書院), 수성구 황금동덕산서원(德山書院), 달서구 호산동이락서당(伊洛書堂)낙선재(樂善齋), 북구 산격동체화당(棣華堂)태전동매강정사(梅岡精舍),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의 낙동정사(洛東精舍)와 다사읍 이천리이강서원(伊江書院) 등이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