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504 |
---|---|
한자 | 金觀濟 |
영어공식명칭 | Kim Kwanje |
이칭/별칭 | 월강(月岡)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886년 6월 8일 - 김관제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10월 - 김관제 대동청년당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44년 - 김관제 조선건국동맹 경북지부 결성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8월 16일 - 김관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결성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2월 - 김관제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선출 |
몰년 시기/일시 | 1951년 7월 1일 - 김관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김관제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관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명성리 -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명성리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묘소 | 김관제 묘소 -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명성리 |
성격 | 독립운동가|정치인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조선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 위원장|조선민족혁명당 경북지부 결성준비위원장|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개설]
김관제(金觀濟)[1886~1951]는 1886년 6월 18일 지금의 경산남도 고성군 개천면 명성리에서 태어났다.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국내로 돌아와 대구에 한약방을 열고 사회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건국동맹에서 활동하였다.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민족혁명당, 민주주의민족전선 등에서 정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호는 월강(月岡)이다.
[활동 사항]
김관제는 1909년 10월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지원과 인재 육성, 그리고 연락을 목적으로 결성된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11년에는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한 후 대구에서 복양당(復陽堂)이라는 한약방을 열었다. 복양당은 ‘관제한약방’으로도 불리면서, 대구에서 가장 유명한 한약방 중의 하나였고, 약령시의 전통을 이은 약전골목에 있었다. 김관제는 재건 달성친목회의 윤상태(尹相泰)와 교유 관계를 맺으면서 지역의 명망가들과도 교유 관계를 넓혀 나갔다. 1919년 2월 23일 무렵에는 이시영(李始榮)·변상태(卞相泰) 등과 함께 상경하여 독립운동 세력과 연락을 취하고자 하였으며, 3·1운동이 발생하자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1920년 3월에는 의열단의 곽재기(郭在驥)·배중세(裵重世)·신철휴(申喆休) 등이 벌인 이른바 ‘의열단 제1차 암살 파괴 계획’[일명 밀양폭탄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김관제는 대구 지역의 명망 있는 유지로서 여러 사회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28년 11월에는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동맹휴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학부형 회의에 참석하여, 다른 참석자들과 달리 학생들의 신속한 등교는 학생들을 위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여 대구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시달림을 당하였다. 1934년 『조선일보』가 전개한 문자보급운동에 지역 차원에서 참여하였고, 1936년 7월에는 대구의 유지들과 함께 경주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한 이규인(李圭寅)의 추도식을 개최하고 40만 원을 기부하였다.
1944년 일제의 패망이 예견되자 김관제는 정운해(鄭雲海)·이상훈(李相薰) 등과 함께 조선건국동맹 경북지부를 조직하였다. 패망 직전 김창숙·정운해 등 조선건국동맹 경북지부 관계자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게 검거되었으나 광복으로 곧 석방되었다.
김관제는 광복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8월 22일에는 우익의 경북치안유지회와 통합하여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의 결성을 주도하고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김관제는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 위원장 명의로 미군정의 하지 중장에게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가 경북 지역의 치안 업무를 잘 수행하고 있음을 알리는 서한을 발송하였다. 아울러 이 서한에서는 동해안 일부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한국인과 일본인 간의 분쟁에 대하여 적절한 조치를 요청하였다. 9월에는 우익 세력을 망라한 한국민주당 창당에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으나 활동하지는 않았다. 한편, 김관제는 대구에서 벌어진 대학설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11월 경북종합대학설립준비위원회가 경북종합대학기성회로 변경될 때, 20여 명으로 구성된 대구시 위원과 집행위원을 겸하였다. 그 결과 1947년 1월 대구문리과대학[현 영남대학교로 통합]이 개교될 수 있었다.
김관제는 1946년 2월 좌익의 통일전선으로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6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 경북지부 결성준비위원회에 참석하고 준비위원장이 되었다. 조선민족혁명당 경북지부의 결성대회는 1946년 8월 3일 대구공회당에서 열기로 하였으나 ‘방역 관계’로 교통이 차단되어 무기한 연기되었다. 김관제는 1947년 6월 1일 서울의 시천교당에서 열린 조선민족혁명당 제10차 전당대표회의에 참여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의 명칭을 인민공화당으로 변경하는 데 일조하였다.
김관제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9·28서울수복 뒤 대구로 내려왔다가 ‘좌익 거물’로 몰려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김관제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1951년 7월 1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김관제의 묘소는 고성군 개천면 명성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관제의 공적을 기려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
2024.07.03 | 내용 수정 | 1911년에는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윤세복·이시열 등과 함께 봉천성 환인현(桓仁縣)에 동창학교(東昌學敎)를 설립하고 교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동창1911년에는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윤세복·이시열 등과 함께 봉천성 환인현(桓仁縣)에 동창학교(東昌學敎)를 설립하고 교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동창학교가 폐쇄되자 1915년에 동지들과 함께 봉천성 흥경현(興京縣)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였다. 1916년 일신학교는 흥동학교(興東學校)로 개칭되었다. 김관제는 이후 귀국하여 대구 약령시에 복양당(復陽堂)이라는 한약방을 열었다. 복양당은 ‘관제한약방’으로도 불렸으며, 대구에서 가장 유명한 한약방 중의 하나였다. 복양당 한의사 김관제는 재건 달성친목회의 윤상태(尹相泰)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유 관계를 맺었다. → 1911년에는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한 후 대구에서 복양당(復陽堂)이라는 한약방을 열었다. 복양당은 ‘관제한약방’으로도 불리면서, 대구에서 가장 유명한 한약방 중의 하나였고, 약령시의 전통을 이은 약전골목에 있었다. 김관제는 재건 달성친목회의 윤상태(尹相泰)와 교유 관계를 맺으면서 지역의 명망가들과도 교유 관계를 넓혀 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