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061 |
---|---|
한자 | 韓翼東 |
영어공식명칭 | Han Ikd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시기/일시 | 1888년 4월 - 한익동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한익동 자제단 발기인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한익동 대동사 이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 한익동 경북산업자문회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7월 7일 - 한익동 대구구락부 창립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한익동 환일상회 사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 한익동 후원상회 사장 역임 |
출생지 | 대구부 경정 -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1가·종로2가 |
성격 | 친일 자본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자제단 발기인|대구부회 의원|후원상회 사장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친일 자본가.
[개설]
한익동(韓翼東)[1888~?]은 1888년 4월 대구부 경정(京町)[현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1가·종로2가]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식민통치 자문기구와 관변단체에서 활동하며 일제에 협력하였다.
[가계]
한익동의 아버지는 한상원(韓尙源)이다. 부인은 서삼순(徐三順)이고, 아들은 한일우(韓一愚)·한학우(韓學愚)이다.
[활동 사항]
한익동은 일본 도쿄[東京]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을 졸업하였다. 1919년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 이후 대구 3·1운동이 경상북도 전체로 확산되자, 조선인들로만 구성된 자제단(自制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3·1운동이 확산되지 못하도록 막고자 방해하였다.
한익동은 1921년 대구곡물신탁 이사가 되었고, 대구산업금융조합의 대주주로 참여하였다. 1922년 경상북도청이 경북산업자문회를 구성하자 회원으로 참여하였고, 1923년 1월 30일 대구도시계획위원회가 대구도시계획조사규정을 결정할 때에도 김재환·서병조·이병학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대구청년회가 침체하고 대구노동공제회가 사회주의 단체를 표방하면서 설립되어 새로운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자, 한익동은 이에 대항하여 서상일·김의균·김재환·박기돈 등과 함께 1923년 7월 7일 대구구락부를 결성하여 문화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구의 대지주 서철규 등과 함께 공호상회(公湖商會)를 설립하였고, 동아일보사 대구지국장과 매일신보사 경주지국장을 맡았다. 1924년 12월 27일 대구에서 경제시사를 다루는 일한 병용 일간신문인 『대구상보(大邱商報)』[『남선경제일보(南鮮經濟日報)』로 전환]를 창간하여 발행인 겸 사장을 역임하였다.
한익동은 1932년에는 합자회사 환일상회(丸一商會)를 설립하여 사장을 맡았고, 1942년 농구와 가구를 제작하여 유통하는 후원상회(厚園商會)를 설립하여 사장을 역임하였다. 이 밖에도 경상북도 도회 의원, 대구부회 의원, 대구상공회의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