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4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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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達城 衡平社 |
이칭/별칭 | 조선 형평사 달성 분사(朝鮮 衡平社 達城 分社)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25년경 대구 달성 지역에서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목적으로 조직된 사회 운동 단체.
[개설]
1925년경 달성군에서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을 목적으로 조선 형평사 달성 분사가 설립되었으며, 부사장에는 이학술, 총무는 손사준이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법적으로 철폐되었으나 사회 관습으로는 신분 차별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1923년 4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차별적인 봉건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려는 조선 형평사가 조직된 이래 1928년 4월까지 1925년경에 결성된 조선 형평사 달성 분사를 비롯해 전국 67개의 형평사 분사가 설립되었다. 달성 형평사는 백정들의 신분 해방과 평등 사회를 목적으로 설립되어 1930년대까지 활동하였으며, 사회 운동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설립 목적]
1925년경 달성군에서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신분제 사회에서의 신분 차별을 타파하고 평등한 신분 사회를 이루어 교육과 사회적 신분상의 균등한 기회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변천]
1925년경에 분사가 설립된 이래 1929년까지 형평 운동을 배척하는 지역민들로부터 몇 차례의 공격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때마다 지역 사회는 형평사원에 대해 배척을 비판하면서 형평사의 신분 해방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5년경 설립된 이래 달성군에서는 형평사원이 백정에 대해 차별적 인식을 갖은 지역민들로부터 공격받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첫 번째는 1925년 5월 달성군 하빈면 형평사원 심시국이 학무 위원 이근수 외 5명이 면민을 선동해 일으킨 쇠고기 불매 운동의 피해를 당했다. 그 내용을 보면, 심시국의 딸이 보통학교에 입학하려 할 때 학무 위원 이근수 등이 입학을 반대하는 동맹 휴학을 선동하였고,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심시국이 이근수에게 면박을 주었다. 이에 분개심을 느낀 이근수 외 5명은 면민을 선동하여 쇠고기 불매 동맹을 만들려 하였다. 그러나 심시국의 양보로 일단락되었다.
두 번째는 1925년 9월 2일 달성군 현풍 청년회 주최의 현풍 소년 웅변대회에서 형평사원 정기표의 강연 내용이 알려지자 현풍 농업 노동자들이 격분하여 형평사 달성 분사의 분사자 이학술과 총무 손사준 등에게 폭행을 가했다. 또 형평 운동을 지원한 현풍 청년회 회원 김판경과 서용이 등에게도 공격하기 위해 그들의 집을 찾았으나 집에 없자 가재도구를 부수는 등 폭행을 가했다. 세 번째는 1929년 5월 27일 달성군 구지면 창동에서 형평사원과 농민들 사이에 사소한 시기가 원인이 되어 충돌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상남도 창녕군 임고면 고암동에 사는 형평사원 신복성 등 3명이 자신들이 만든 키를 팔기 위해 구지면 시장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음주 상태에서 지나가는 아이를 불러 세우는 모습을 본 음주 상태의 농민들이 항의하면서 몸싸움이 벌여졌다. 그 과정에서 창동 동민이 낫으로 신복성의 가슴을 찔러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출동한 구지 주재소에 의해 가해자는 잡혔고, 형평사원 신복성은 중태 상태에 빠졌다.
[현황]
1926년 조선 총독부 경무국 조사에 따르면 경상북도의 백정 호구 수가 1,367호에 6,121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경우에 해당한다. 1934년 경상북도 지역의 백정은 1,549호에 7,445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대구 달성 지역은 98호에 434명이었다. 조선 형평사 달성 분사는 1925년경에 설립된 것으로 보이며, 신분 해방 운동과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법적으로 철폐되었으나 사회 관습으로는 신분 차별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백정들이 신분 해방과 사회적 평등을 위한 실천 활동을 스스로 전개하였고, 사회적으로도 신분적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여론이 현안으로 부각되는 계기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