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1662 |
---|---|
한자 | 落榜居士 李進士 |
영어공식명칭 | Nakbang Geosa Lee Jinsa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다원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서 김진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낙방거사 이진사」는 자식도 없이 노모를 모시고 살던 부부가 모친이 돌아가시자 이때 방문해 준 세 손님의 도움으로 명당을 얻어 장사지냈다는 풍수담이고, 약조대로 이진사가 한 달에 세 번씩 과부 허씨댁에 가서 자고 와서 아들 삼형제까지 얻었다는 명당 발복담이기도 하다.
[채록/수집 상황]
1985년 한국학 중앙 연구원[구 한국 정신문화 연구원]에서 편찬한 『한국 구비 문학 대계』7-14 달성군편에 「낙방거사 이진사」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는 1984년 박종섭이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 묘리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박엽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또한 2014년 달성 문화 재단과 달성 군지 간행 위원회에서 간행한 『대구의 뿌리 달성』의 하빈면 설화 항목에도 동일한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용]
옛날 강원도 홍천 땅에 낙방거사 이진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진사는 글방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는데, 제자들은 과거에 급제하는데 자기는 번번이 낙방하니 주위 사람들이 그냥 선생님이라고 부르기가 뭐해서 듣기 좋게 이진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이들 몇을 가르쳐 호구지책을 삼았는데, 한 해는 흉년이 들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풍년이 들었다는 전라도 땅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진사는 자식도 없이 부부가 노모를 모시고 살았다. 그곳에서도 역시 아이들 몇을 가르쳐 끼니를 이었는데, 한 해는 노모가 돌아가셨다. 연도고 없는 객지에 와서 모친이 돌아가시니 장사지낼 일이 막막하였다. 모친의 산소를 쓸 땅이 없어 보름 정도 시신을 방안에 둘 수밖에 없었다. 초조한 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저녁, 어떤 영감이 지나가다가 이진사의 집에 들렀다. 영감은 "이진사 계시오?"라고 소리쳤다. 초면이었지만 내 집에 오는 손님이라 이진사는 예의 바르게 맞이해 주었다. 윗방에는 모친의 시신을 모셔 두었기 때문에 아랫방에 손님을 모셨다. 그러고는 밖에 있는 아내에게 "여보, 손님이 오셨는데 저녁을 해야 되지 않겠소?"라고 말했다. 저녁거리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남은 쌀과 보리쌀 한 주먹을 긁어서 물을 넣고 죽을 끓였다. 이진사와 영감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또 한 노인이 찾아와 "이진사 계십니까?"라고 하였다. 이진사는 "아이고 어서 들어오십시오. 어디로 가시는 손님인데 이렇게 오십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라고 하고, 부인에게 "아이 여보, 손님이 한 분 더 오셨는데 저녁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내가 "예 물을 조금 더 붓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진사는 "그래, 그렇게라도 해 보시오."라 말했다. 그러고는 세 사람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저녁을 막 차리려는데 웬 승려가 한 명 찾아와 "이진사 계십니까?"라고 하였다. 이진사는 "어디를 가시다가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라고 하고 승려를 안으로 들이려 했다. 그러자 승려는 "아니 소승은 안 들어가도 좋습니다. 지나가다 보니 이 집에 상서롭지 못한 기운이 돌기에 흉사를 당한 것 같아 들여다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진사는 "예, 아무튼 들어오십시오. 사람 사는 집에 와서 이래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승려는 "예, 그러면 윗목이라도 좀 신세를 지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이 지사가 또 부엌에 나가서 "여보, 손님이 한 분 더 오셨는데 어찌해야 되겠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예, 알겠습니다. 제가 굶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이제 물을 더 부을 수도 없었다.
얼마 있다가 저녁을 들여놓는데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보아도 밥알 하나 건지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님 세 사람은 아무 불평없이 맛있게 후루룩 마셨다. 그러고는 "이진사 정말 잘 먹었습니다. 좀 시장하던 차에 요긴하게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상을 물린 후 모두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제일 먼저 온 손님이, "아까 스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우리도 오늘 여기 들어올 때 이 집이 상중인 걸 대강 눈치들어와챘습니다. 막상 들어와 보니 곤궁하기 이를 데 없는데, 우리가 뭔가 이 집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멀건 죽이었지만 그 정성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러니 뭔가 보답을 하고 갑시다." 하자, 다른 두 사람 또한 "아 좋습니다. 가난한 선비 이진사를 위해서 우리가 뭔가 도움을 주고 갑시다."라고 했다. 그래서 세 사람이 의논을 했다. 제일 먼저 온 사람이 말했다. "내가 풍수에 별로 밝지는 못하지만, 오다가 보니 석 달 후에 발복(發福)할 자리가 하나 있던데 거기 장사를 지내는 것이 어떻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두 번째 온 손님이, "저 먼저 오신 손님 말씀도 좋은데 내가 오다 보니 한 달 후에 발복할 자리가 있던데 어디가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맨 마지막에 온 승려가 "태평세월입니다. 두 분 말씀은 고마운데, 오늘 저녁 당장 땟거리도 없는데 이진사가 한 달 후까지 살겠습니까? 오늘 저녁 자시에 장사를 지내면 축시에 발복할 자리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두 손님은 "아이고 대사님, 그런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당장 그렇게 합시다. 이 집에 일꾼도 없으니 우리 세 사람이 저 상주하고 같이 장사를 치러 주고 갑시다. 이진사, 연장이 필요한데 집에 없으면 이웃집에 가서 삽과 괭이를 좀 빌려 오시오."라고 했다.
이진사는 이웃집으로 가 연장을 빌려 왔다. "자 시신은 우리가 업고 갈 수 없으니 상주가 업으시오."라고 했다. 이진사가 시신을 업고 승려가 말하는 장소로 나섰다. 집을 떠나면서 이진사가 "여보 우리가 빨리 갔다 올 테니 밤참이라도 좀 끓여 놓으시오."라고 아내에게 부탁했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남의 밭에 시신을 놓고 그곳을 파라고 했다. 땅을 파서 시신을 묻고 평토(平土)를 했다. 봉축(封築)도 없이 암장이나 다름없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와 사랑에 모두 앉았다. 이 진사는 손님들에게 "잠깐 기다리시오, 국밥이라도 한 그릇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집사람이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말했다. 남편이 국밥이라도 끓여 놓으라고 했지만 음식할 거리가 없었다.
아내가 방에 들어가더니 장롱 서랍에서 비녀를 하나 꺼내 놓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여보, 이것은 우리 집 가보로 내려오는 금비녀인데 어머님이 제게 주셨습니다. 제가 굶어 죽어도 이것만큼은 간직하려고 했는데, 오늘 같은 날, 부모님 장사를 지내 주신 저 고마운 분들을 어떻게 그냥 돌려보내겠습니까? 이것을 저 너머 허 과부댁에 갖다 주고 쌀 한 말만 빌려 오십시오. 밥이라도 한 그릇 뜨끈하게 대접하면 좀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이진사는 아내의 말에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여보, 당신 마음이 정말 고맙소, 내 꼭 잊지 않겠소."라고 했다. 그러자 아내가 "여보, 당신과 제가 남인가요? 당신 일이 제 일이지요, 아무 말씀 마시고 어서 갔다 오십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이진사 그 비녀를 가지고 허 과부댁으로 갔다. 그 집은 인근 고을에서 소문난 부잣집이었다. 이진사가 "이리 오너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허 과부댁은 바느질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다. 장롱 문이 열리면서 용이 세 마리 튀어나와 자기 치마폭에 안기는 것이었다. 이게 웬일인가 싶어 얼른 끌어안았는데 그때 잠이 깼다. 밖에서 하인이 "마님"하고 불렀다. 과부는 "왜 그러느냐?"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하인이 "저 너머 이진사께서 마님을 좀 뵙자고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과부는 "그래, 들어오시라고 해라."라고 대답하였다. 그러고는 방으로 들어온 이진사에게 "웬일로 이 밤중에 나를 찾아오셨소?"라고 물었다. 이진사는 "제가 모친상을 당해 장사를 지내면서 손님들이 수고를 하셨습니다. 부끄럽지만, 대접을 하려고 하니 양식이 없어, 아내의 비녀를 하나 가지고 왔는데 이걸 담보로 쌀 한 말을 빌려 주십사 하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과부가 "좋소, 내가 치마를 벌릴 테니 그 비녀를 이 치마에 던지시오."라고 말했다. 이진사가 허 과부댁의 치마에 비녀를 던졌다. 허 과부가 치마에 비녀를 받고 보니 용이 세 마리 그려진 비녀였다. 치마를 싸서 그대로 장롱에 갖다 놓고 문을 닫아걸었다. 그러고는, "알겠소, 내가 곧 하인을 시켜 보내드리지요. 그런데 이유는 묻지 말고 한 달에 꼭 세 번씩만 내 집에 와서 자고 가시오."라고 했다. 이진사는 "예,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이진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달구지 소리가 났다. 그러자 승려가, "보시오, 이제 발복 났소, 축시요."라고 하였고, 두 손님들은 승려의 말이 맞았다며 손뼉을 쳤다. 달구지에 쌀이며, 뭐며 온갖 것을 싣고 왔다. 이진사의 아내는 따뜻한 밥을 해서 손닙 대접을 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자, 우리 할 도리는 다 했으니 이제 갑시다. 이진사 오래오래 사시오. 그리고 당신 슬하에 아들 삼형제를 둘 것이오."라고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사람들은 기인(奇人)이나 신령 같았다. 아무튼 이진사는 허 과부댁과 약조를 했으니 한 달에 세 번씩 그 집에 가서 자고 왔다. 자기 부인도 양해를 하였다. 그런데 과연 삼 년 만에 허 과부댁이 연년생으로 아들 삼형제를 낳았다. 그 아들들이 장성해서 모두 훌륭한 정승, 판서가 되었다. 이것이 모두 묘를 잘 써서 그렇게 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모티프 분석]
「낙방거사 이진사」의 주요 모티프는 '명당 찾기', '용 세 마리가 안긴 꿈' 등이다. 이진사는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도리를 지키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영감, 노인, 승려 등 세 손님이 찾아와 복을 주는데, 여기서 손님은 기인(奇人)이나 신령 같은 존재이다. 결국 「낙방거사 이진사」의 전승 집단은 이 이야기를 통해 착하게 살면 초인적인 존재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의지를 담아내고 있다. 또한 명당에 관련된 설화는 대부분이 묫자리를 잘 써서 부자가 되거나 관직에 올랐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낙방거사 이진사」도 '용꿈' 을 태몽으로 꾸고 태어난 인물은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민중 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