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18
한자 京釜線- 大邱驛, 都市- 風光-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대구 지역의 전통적인 교통로를 대체한 근대 문명의 상징 경부선대구역.

[기차와 철도는 근대문명의 상징]

“차마다 모두 바퀴가 있어 앞차에 화륜이 한 번 구르면 여러 차의 바퀴가 따라서 모두 구르게 되니 우뢰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처럼 날뛰었다. 한 시간에 삼사백 리를 달린다고 하는데 차체는 안온해 조금도 요동하지 않으며 다만 좌우에 산천, 초목, 가옥, 인물이 보이기는 하나 앞에 번쩍 뒤에 번쩍하므로 도저히 잡아 보기 어려웠다. 담배 한 대 피울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신바시[新橋]에 도착하였으니 그 거리가 구십 오리나 온 것이다.[김기수, 『일동기유(日東記遊)』에서]

1. 기차와 철도, 세상을 뒤집어 놓다

1790년 올리버 에반스(Oliver Evans)가 고압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증기기관의 진화에 마침표를 찍은 이래 1814년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이 만든 탄갱용 증기기관차가 이전의 무개화차를 사라지게 하였다. 그 뒤 영국에서는 철도를 석탄 운반뿐만 아니라 상품과 사람을 이동시키는 전국의 일반 교통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1830년에 리버풀-맨체스터 사이에 놓여진 철길은 최초의 근대 철도였다. 영국에서 시작된 증기기관차는 1832년 프랑스를 시작으로 세계로 파급되었다. 아시아에서는 1850년 인도에 이어 1872년 일본이 도쿄와 요코하마를 연결하는 철도를 개통하였다.

2. 기차와 철도는 근대문명의 상징이 되었다

철도는 공간의 압축, 시계와 시간, 대량 이동, 새로운 기술과 직업 등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였다. 1750년대 약 10일 걸리던 영국 런던과 에든버러 사이의 여행이 1836년에는 단지 45시간 30분이면 충분하였다. 철도는 시간의 단축과 소멸뿐만 아니라 공간의 압축과 소멸을 불러 왔다. 같은 시간에 과거의 몇 배에 이르는 공간상의 거리를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의 초기 열차의 평균 속도는 시속 32㎞ 내지 시속 48㎞였는데, 당시 우편 마차보다 3배나 빠른 것이었다. 같은 거리를 3분의 1의 시간에 도달한 것이다. 시간 단축은 일반적으로 공간 압축으로 이해되었고, 운송 시간의 단축이 교통 공간의 확장으로 나타났다. 곧 폐쇄적이었던 도시들이 철도와 함께 도시의 외곽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대구는 영남대로와 낙동강 물길로 이어져 있었다]

1. 영남대로는 영남제일관으로

대구는 조선시대 전국의 주요 9대 도로 중의 하나인 영남대로 상에 있었다. 칠곡의 우암창(牛岩倉)에서 금호강을 건너 대구의 관문인 영남제일관(嶺南第一館)에 이르렀고, 거기서 다시 가창의 오동원(梧棟院)을 경유, 팔조령을 넘어 청도군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의 도로망은 대로·중로·소로의 세 등급으로 구분되었고, 수도인 한성을 중심축으로 하여 방사선형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대구는 영남대로가 관통하면서도 소로에 위치하였다. 그러면서도 대구는 한성과 부산을 연결하는 도로상에 위치하여 낙동강금호강 수계가 지닌 교통상의 중요성을 품고 있었다.

2. 소금 배가 다니는 낙동강 물길

낙동강은 우리나라에서 압록강, 한강에 이어 세 번째로 긴 강으로 길이 510.36㎞, 유역면적은 2만 3384㎢이다. ‘낙동(洛東)’이라는 이름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와서 낙수, 가야진 등과 함께 얻어진 이름으로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 ‘낙동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상주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라는 뜻으로 ‘낙동강’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낙동강은 고려시대 이후 영남 지역의 산물과 세미(稅米)의 운송로로 이용되었다.

낙동강은 ‘소금길’이라 불릴 만큼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길이었다. 더욱이 조선 후기에 낙동강 수운은 경상북도 지역의 상업적 농업이 활발히 일어날 수 있는 배경이었다. 19세기 경상북도의 상권은 낙동강 배경의 어염미두(魚鹽米豆) 무역[남쪽의 물고기와 소금을 북쪽의 쌀과 콩으로 교환하는 방식의 상업]을 중심으로 상주·안동·대구·경주를 맥으로 하는 네 권역이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경부선과 대구역, 대구의 풍광을 바꾸다]

1. 대구의 남쪽이 아닌 북쪽에 대구역이 들어서다

경부선 철도의 부설과 대구역 개통 이후 대구의 풍광은 상전벽해와 같이 탈바꿈하였다.

우리나라의 철도는 1897년 3월 22일 인천 우각리에서 경인선 기공식을 가진 뒤 1899년 9월 18일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노선이 임시 개통한 것이 효시였다. 경부선 철도는 1901년에 기공되어, 1904년 12월 27일에 완공되었다. 1905년 1월 1일에 영업을 개시하였다. 경부선 최종 노선은 종래의 주요 교통로와 새로운 지역을 적절히 연결함으로써 경부선 한 노선으로 한반도 남부의 정치·경제·행정·사회·군사적 지배권을 장악하는 구도를 갖추었다.

경부선 개시 당시의 기차는 미국 볼드원사의 콘솔리데이션으로 객차 6량을 연결하여 초량과 영등포 구간을 운행하였다. 당시 소요시간은 14시간으로 예상되었다. 이후에는 급행열차 융희호가 운행하면서 소요시간이 11시간으로 줄어들었다. 일일 운행 횟수는 대구-초량 3회, 대구-서울이 2회였다. 1909년 1월 한파가 몰아치는 신년 벽두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계략에 남쪽을 순행할 때 경부선을 이용하여 대구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대구역사는 2층 구조로 1905년 4월에 준공되었다. 1층은 일본식으로 목재로 지어졌고, 2층은 서양식 식당과 주방을 갖추었다. 철판 기와지붕에 철골로 된 부속 건물도 있었다. 대구역사는 1915년에 대합실 확장을 위하여 증축되었고, 1937년에는 벽돌과 목조 혼합의 장방형 창고인 대구 조차장도 새로 지었다.

그런데 대구를 관통하는 경부선 철도는 남문 밖이 아닌 동쪽을 크게 돌아 읍성 북문 밖에 건설되었다. 북문 주변은 남고북저형의 대구 지형으로 볼 때, 낮은 지대로서 주거지역이 아닌 습지였다. 사실, 전통적인 주거 또는 중심지역이 아닌 살기 불편한 습지에 철도와 역사가 건설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이로써 영남제일관이 있던 남쪽은 구도심이 되어 낙후된 지역이 되고, 대구역과 그 인근은 도로와 하수시설이 잘 갖추어진 신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신도시는 일본인이 차지하면서 대구는 식민도시로 변질되어 갔다.

2. 대구역, 대구의 풍광을 식민도시로 바꾸어 놓았다

경부선 개통과 대구역의 영업 개시는 대구의 풍광에 실로 엄청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첫째, 대구역은 전통 도시 대구가 식민도시 대구로 재편되는 중심축이자 식민도시 대구를 움직이는 중심축이었다. 대구역 앞에는 여느 역과 마찬가지로 시계탑이 있는 ‘역전광장’이 생겼다. 역전광장에서 남쪽 직선 방향으로 폭 20m의 도로인 중앙통이 개설되었는데, 일본인들은 중앙통을 대구를 침탈할 자신들의 최대 자랑으로 삼을 정도였다.

또 역전광장의 좌우에는 동서의 태평로 도로가 개설되었다. 역을 중심으로 한 태평로 도로변에는 인력거, 짐꾼이 붐비고, 여관과 음식점, 창고와 석탄 회사 등이 즐비하였다. 나중에는 택시, 부영버스, 시외버스 정거장 등의 교통 시설이 들어찼다. 태평로의 동쪽으로는 일본인의 농업 지대인 동촌(東村)을 거쳐 ‘경주가도’로 연결되어 포항까지 갈 수 있었다. 서쪽으로는 태평로를 따라 일본인 상업 공간인 북성로와 연결되고, 전매지국과 유곽을 거쳐 달성공원에 연결되었다. 태평로는 방문자들이 대구의 풍광을 보기 위하여 가는 코스였으며, 정미소가 집결되고, 경마장이 있는 원대동을 거쳐 칠곡을 비롯한 경북 중북부로 이어졌다.

둘째, 대구역은 도시의 구조를 근원적으로 재구성하게 하였다. 바로 대구읍성의 철거였다. 대구읍성의 철거는 1905년에 대구 일본인 사회와 일본 군대에 의하여 시도되었으나 1906년부터 1907년까지 대구군군수 겸 경상북도관찰사 서리로 부임한 친일관료 박중양 주도로 마무리되었다. 1906년 대구 일본인 거류민단은 동서남북 등 각 방위에 3명씩 모두 12명으로 구성되는 ‘도로위원회’를 구성하고, 박중양과 연계하여 대구읍성 철거와 6칸 폭의 도로 조성에 나섰다. 도로는 1909년 12월에 완공되었는데, 지금의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가 그 당시 완공된 도로에 해당한다.

셋째, 대구역의 개통은 대구읍성의 철거에 이어 경상감영의 풍광을 바꾸었다. 1906년 7월 대구이사청이 경상북도관찰부의 중심 건물인 선화당에 들어섰다. 대구이사청은 관찰부의 부속 건물을 무상으로 사용하였다. 1908년 대구읍성 철거로 대구를 떠나 평안남도관찰사로 갔던 박중양이 경상북도관찰사로 부임하면서였다.

박중양은 1908년 경상북도관찰부의 객사를 민중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동원하여 무너뜨렸다. 이때 대구 시민들은 「중양타령」을 부르며, 사라진 객사와 대구읍성의 철거, 공공건물 방매, 협성학교 폐쇄 시도 등을 내용으로 친일 관료 박중양을 성토하였다.

1909년 시가지 간선 도로 개설 사업으로 대구 최초의 십자도로를 조성하였다. 대구 십자도로는 종로에서 대안동에 이르는 남북선과 대구부청에서 도청이 있는 포정동을 거쳐 서문로 이어지는 동서선으로 이루어져 경상북도관찰부의 공간을 크게 네 부분으로 해체하여 옛 경상감영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게 하였다.

경상감영에는 경상북도도청이 세워지고, 경상감영 관풍루가 있던 자리에는 일본헌병대가 설치되고, 그 옆에는 대구우체국이 세워졌다. 대구우체국 맞은편의 경상감영에는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이 세워졌다. 지금은 근대대구역사관이 있다. 조선식산은행 서쪽 맞은편에는 대구경찰서가 세워졌다. 결국, 경상감영 내지 경상북도관찰부의 공간은 선화당징청각만 남겨 놓고, 일제의 식민지배기구가 들어섬으로써 식민 통치의 중심축이 되었다.

대구역의 개통과 함께 대구읍성 철거와 경상북도관찰부의 훼손은 대구가 식민도시로 전락하였음을 드러내었다. 또한 1906년부터 대구의 상징 공간인 달성이 일본인들에 의하여 달성공원으로 조성되고, 그 중앙에 일본 내셔널리즘의 실행 장소인 신사가 세워지면서, 대구는 전형적인 식민도시의 풍광을 갖추게 되었다.

[성벽이 도시를 에워싸고, 거대한 붉은 깃발이 도시를 굽어본다]

1601년(선조 34)에 상주와 경주에서 운영되었던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되면서 대구는 명실상부한 영남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대구는 해안현(解顏縣), 하양현(河陽縣), 경산현(慶山縣), 수성현(壽城縣), 화원현(花園縣), 하빈현(河濱縣)을 포괄하는 큰 읍이었다.

대구읍성은 1736년에 축조된 이래 1870년(고종 7)에 대대적 보수를 거쳐 완성되었다. 대구읍성 성벽의 총 연장은 2,124보[약 2,680~2,700m], 성벽 높이는 22척[약 6.6m]로서 서쪽 및 남쪽 18척[약 5.4 m], 동쪽 및 북쪽 17척[약 5.1m]이었고, 성의 폭은 7척[약 8.9m]이었다. 대구읍성에는 진동문(鎭東門), 달서문(達西門), 공북문(拱北門), 영남제일관(嶺南第一館) 등 네 개의 대문과 동소문(東小門), 서소문(西小門) 등 두 개의 암문 그리고 망루 1기가 있었다. 성벽 위에는 남쪽에 ‘선은(宣恩)’, 동쪽에 ‘정해(定海)’, 서쪽에 ‘주승(籌勝)’, 남쪽에 ‘망경(望京)’이라 이름 붙인 네 개의 누각을 새로 세우고, 그 사이에 8개소의 포루를 설치하였다. 읍성 안에는 다섯 개의 우물을 마련하였다.

대구는 경상감영 소재지로서 경상도의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가졌기에 경상감영의 공간과 공해(公廨)[관가의 건물]도 일정한 규모의 크기를 갖추었다. 1907년 당시 경상감영의 공간은 감영, 내아, 객사 등으로 구분되면서도 감영에는 선화당, 징청각을 비롯하여 21개 부속건물이 운영되고 있었다.

1888년 대구를 방문한 샤를 루이 바라(Charles Louis Varat)[1842~1893] 일행은 대구읍성에 올라 대구의 풍광을 꼼꼼히 즐겼다. 샤를 루이 바라 일행은 대구읍성 성곽에 올라 성벽 위의 길이 마치 중국 베이징의 길과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또한 대구읍성에서 바라본 대구의 풍광을 정리하면 대구는 위용 있는 성문과 압도적인 관아 건물, 밀집된 기와집과 초가집으로 짜여 있었고, 저 멀리 금호강의 아름다운 모습까지 어우러져 있었다고 적었다. 샤를 루이 바라는 대구는 “성벽이 도시를 에워싸고,…… 거대한 붉은 깃발이 도시를 굽어보며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는 소감을 남겼다.

개항 이후 전통 읍성 도시 대구에 외국인이 몰려들었다. 천주교 신부와 기독교 선교사들이 대구의 동산, 계산동남산동에 자리 잡았다. 청일전쟁 전인 1893년 9월 일본 오카야마[岡山] 출신의 히자쓰키[藤付]와 무로[室] 등이 영남대로로 통하는 남문인 영남제일관 안에 잡화상을 열었다. 외국인들이 정착한 곳은 대구읍성 남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남대로로 대구에 다다르기 위하여는 대구읍성의 남문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경북의 물산은 대구를 거쳐 해외로]

경부선 철도는 철도의 지선화를 낳고 농촌을 근대의 희생물로 만들어 갔다.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에 걸쳐 건설된 대구선과 경북선은 경상북도 내륙의 풍광과 사정을 크게 바꾸었다. 먼저, 1918년 5월 하양-금호를 잇는 철도선의 개통을 시작으로 1919년 경주 포항을 거쳐 학산까지 이어지는 경동선이 건설되었다. 다음은 조선철도주식회사에 의하여 1924년 10월 김천-상주 사이 36㎞의 철도가 개통되고 이어 1931년 예천을 거쳐 안동까지 이어지는 총연장 118.1㎞의 경북선이 건설되었다.

이를 통하여 동해안의 영일이 부산에서 대구의 상권으로 이동하고, 경상북도 북부의 물산이 김천을 거쳐 대구로 집중되었다. 더욱이 경북선은 철도 부설 이전의 낙동강 수운을 대체하면서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축소하고, 동시에 철로변에는 김천과 같은 새로운 근대 도시를 탄생시켰다. 경부선 철도에서 비롯된 변화는 1931년 츠지 스테조[逵捨藏]의 『경북연선발전지(慶北沿線發展誌)』의 편찬을 가능하게 하였다.

경부선의 지선인 대구선과 경북선은 경상북도의 4개 독자적 상권을 일원적 체계로 변화시켰다. 한 예를 살펴보면, 대구는 제사업의 중심 도시였는데, 그 원료인 누에는 상주를 비롯한 경상북도 서북부에서 전국 생산량의 44%를 생산하고 있었다. 누에가 경북선과 경부선을 통하여 대구에 집중되었고, 대구의 제사 공장에서 생산된 생사는 다시 경부선을 통하여 부산으로 이동하여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물론, 제사 공업의 초과이윤은 식민지 공업구조에서 일본이 독점하는 형태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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