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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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三一運動, 全民族抗爭-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20년대 다양한 이념과 폭넓은 운동 노선의 독립운동이 펼쳐지는 배경이 된 1919년 대구의 3·1운동.
[3·1운동, 들불 번지듯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나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전민족적 항일운동의 서막이 올랐다. 한국인의 의식에 농축된 자주와 독립에 대한 열망이 민족자결이 고조되는 국제정세의 변화와 맞물려 폭발한 것이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하고, 동화정책을 기저로 헌병경찰제도에 의한 무단통치를 폭압적으로 실시하는 가운데서도 독립을 향한 한국인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1917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공화주의 이념의 「대동단결선언」, 1918년 중국 만주 길림에서 독립전쟁 노선의 「대한독립선언서」 등이 제기되었다. 대구에서는 1913년에 재건 달성친목회가 조직되고, 1915년에 광복회가 조직되어 국내 민족운동을 펼치는 가운데 1916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대구권총사건이 발생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東京]의 한국인 유학생 600여 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일제를 향한 혈전을 선포한다’는 내용의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아 국내에서도 천도교계의 손병희,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 등 종교계 인사와 학생들이 연합하여 민족대표를 선정하고, 1919년 3월 1일 고종의 국상일을 기하여 비폭력·무저항 만세 시위 계획을 세웠다.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의 파고다공원에 5,000여 군중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내를 돌며 만세 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평양·진남포·의주·선천·원산·안주 등 전국 각지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만세 시위가 펼쳐졌다. 이들 도시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 근대적 표상이 가장 두드러진 공간이었다. 만세 시위 참여자는 청년·학생·교사·지식인·노동자·농민·상인·시민 등 민족의 모든 계층이 망라되었다.
[3월 10일 덕산동 동문시장에서 2차 만세 시위가 펼쳐지다]
1919년 3월 10일 덕산동 동문시장에서 3월 8일에 이은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동문시장의 위치가 남문 밖에 있었기에 ‘남문(밖)시장’으로도 불렸다. 3월 8일 만세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은 3월 9일에도 학교와 달성공원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려 했으나 일본 관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박남준(朴南俊)·김재소(金在炤)와 계성학교 학생 박태현(朴泰鉉)·박성용(朴聖容) 등이 지방민 김재병(金在炳)·이덕주(李德周)·김치운(金致雲)·김윤덕(金潤德)·서상철(徐相喆) 등과 협의하여 3월 10일 동문시장에서 만세 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0일 오후 4시 무렵 장꾼으로 가장한 시위대가 동문시장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 200여 명이 동참하였다. 일제 관헌은 3월 10일 만세 시위 연루자로 무려 65명을 체포하였다.
1919년 3월 8일과 3월 10일 만세 운동으로 인하여 대구고등보통학교에서는 3월 24일까지 동맹휴교 투쟁이 벌어지고, 5월 20일에야 정상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두 차례의 만세 운동으로 인하여 무려 75명이 대구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실형으로 탄압을 받은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참가자의 나이는 최저 15세[이규환, 학생]에서 최고 56세[이덕주, 농업]까지 넓었는데 10대에서 30대가 주축이었다. 직업의 경우 종교계와 청년, 지식인이 주축을 이루면서도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들이 만세 시위의 주체로 등장하는 특징을 보였다.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모두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죄로 징역 3년에서 6개월까지의 징역형으로 옥고를 겪었다.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만세 독립운동이 펼쳐지다]
대구의 3·1운동은 1919년 3월 8일 큰 장[서문시장]에서 시작하였다. 3월 8일에 일어난 대구의 3·1운동은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빨랐다. 대구의 3·8 만세 시위는 경북에 파급되어 5월 7일 청도 매전의 만세 시위로까지 이어졌다. 일제는 대구 주둔의 일본군 20사단 예하 보병 80연대 병력을 경북 각 군에 배치하여 3·1운동의 확산을 막으려 하였지만 도민의 자주독립 의지를 막을 수 없었다.
대구에서는 1919년 2월부터 만세 시위 운동의 움직임이 꿈틀거렸다. 1919년 2월 16일에 김규식(金奎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와 질녀 김마리아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일본을 거쳐 대구에서 계성학교(啓聖學校) 교사 백남채(白南採)를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그 뒤 백남채는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과 계성학교 교사 김영서(金永瑞)·김태식(金台植) 등을 만났다. 그즈음 2월 24일 이만집 목사는 자신을 찾아온 민족대표 33인으로 경상도의 연락을 책임진 이갑성(李甲成)을 만나 만세 운동을 협의하였다. 이만집은 다시 교회 관련 인사와 계성학교 교사를 만났다.
계성학교 교사들은 동교의 학생들에게 만세 운동에 함께 할 것을 권유하였다. 또한 1919년 3월 5일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은 자신이 하숙하던 대남여관에서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이자 여관집 아들인 허범(許範)에게 만세 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허범은 다시 친구 신현욱(申鉉旭)을 비롯한 같은 학교 학생들에게 만세 운동 계획을 알리고 동참 약속을 받아 냈다.
평양의 숭실학교 학생 김무생(金武生)이 1910년 3월 7일에 경북 김천의 예수교 전도원 박제원과 함께 신명여학교 교사 임봉선(林鳳仙)을 만나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대구고등보통학교의 허범은 신명여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을 찾아가 신명여학교도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또한 성경학교(聖經學校) 학생들에게도 만세 운동 계획이 전달되었다. 하지만 1919년 3월 3일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洪宙一), 3월 8일 백남채가 예비 검속되었다. 이로써 만세 운동을 추진하던 지도부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1919년 3월 6일 남성정교회 장로 김태련은 「독립선언서」를 자신의 집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인쇄하고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기와 태극기를 만들었다. 계성학교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시위 운동에 쓰일 태극기를 만들고, 정원조를 대구고등보통학교에 보내 시위 일시와 장소가 3월 8일 오후 3시 큰 장[서문밖 시장]임을 확인시켰으며, 신명여학교와 성경학교에도 전달하였다. 1919년 3월 8일 만세 운동에 앞서 대한독립만세 또는 태극기에 독립만세라고 쓰인 전단이 도청 정문과 대구 곳곳에 붙여졌다.
1918년 3월 8일 오후 서문시장에 만세 운동 관련자들이 모여들었고, 학생들과 시장과 주변에 모여들었다. 시위대는 군중을 포함하여 약 700~800여 명 정도였다. 김태련이 「독립선언서」를 일부 낭독하였다. 이만집이 “지금은 조선 독립의 시기로서 각자가 독립을 희망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자연히 독립할 수 있다는 것이므로 독립 만세를 고창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드높이 삼창하였다. 이어 군중이 시위대를 형성하여 서문시장을 나서 서문로에서 대구경찰서[현 대구중부경찰서]에 이르자 일제 관헌이 진압 태세를 갖추었다. 시위대는 경북도청[현 경상감영공원] 방향의 행진을 틀어 종로 방향으로, 종로에서 다시 동성로로 행진하였다. 행진 중 대구경찰서 방면에서 제화노동자 강학봉의 인솔을 받은 노동자 30여 명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 방면의 달성군청[현 대구백과점 본점 자리]에 이르자 5, 6대의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 군경이 대기하고 있었다. 일본 군경이 시위대를 향해 폭압적으로 진압하였다. 그때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던 김태련이 일본 관헌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자 김태련의 아들 김용해(金溶海)가 달려들었으나 김용해도 폭행당했다. 그 뒤 김용해는 휴유증으로 결국 사망에 이르고 말았다. 일본 관헌은 3월 8일 만세 운동과 관련하여 157명을 구속하였다. 그 가운데 67명을 재판에 넘겼다. 한편, 3월 8일 대구농림학교 학생들도 만세 운동에 참가하기 위하여 교문을 나섰으나 저지당하여 기숙사에 감금되어 있었다. 만세 운동의 주축 학교인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등 세 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3월 30일 동화사 지방학림의 덕산동 동문시장 만세 시위]
달성 공산 출신으로 서울의 불교중앙학교에 다니던 윤학조(尹學祚)는 3월 1일 파고다공원의 만세 시위에 참가한 뒤 고향에서도 만세 시위를 벌일 계획이었다. 1919년 3월 23일 동화사 지방학림의 권청학(權淸學)·김문옥(金文玉) 등은 윤학조를 만나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권유받았다. 3월 28일 윤학조는 동화사 심검당에서 지방학림 학생들에게 “조선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기에 우리도 조선 민족의 일원으로 운동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은 그 뜻에 찬성하였다. 이에 1919년 3월 30일 남문 밖의 동문시장에서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태극기를 손수 만들었다.
1919년 3월 29일에 9명의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은 동문시장과 가까운 동화사 출장소[현재 보현사]에 들어와 대형 태극기를 더 만들었다. 3월 30일 오후 2시 무렵 학생들은 2,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있던 동문시장에서 한가운데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장을 행진하였다. 시위를 주도한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은 출동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았고, 1919년 4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4월 15일 대명동 만세 시위와 4월 26일 팔공산 미대동 만세 시위]
1919년 4월 15일 오후 5시 무렵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1919년 당시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의 공동묘지 북쪽에서 강윤옥(姜潤玉)과 장용암(張龍岩) 등 두 사람이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만세 시위를 펼쳤다. 1919년 5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강윤옥은 징역 8월, 장용암은 징역 4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판결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기각 판결을 받았다.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1919년 당시 달성군 공산면] 채씨(蔡氏)들의 동족부락에 사는 채학기(蔡鶴基)는 대구 만세 시위 때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접하고 민족 독립에 공감하였다. 그 뒤 채학기와 마을의 청년들이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1919년 4월 26일 오후 10시 무렵 미대동 동쪽의 여봉산(礪峯山)에 올라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4월 28일에는 더 많은 마을 청년들이 여봉산에 올라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마을 청년들은 두 차례 산호 시위로 말미암아 팔공주재소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대구 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강압적인 조사를 받으면서도 “동양척식회사를 철폐하라.”, “조선인도 자주력이 있다. 우리 민족을 노예화하지 말라.”라고 항변하였다. 시위 운동자들은 10대에서 20대에 걸친 농업에 종사하던 청년들이었고, 1919년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에서 8개월까지의 실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친일파들 대구 자제단을 만들어 만세 운동을 방해하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대구에서는 친일파와 일제 관헌이 연합하여 민심을 가라앉히고 만세 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자제단을 결성하였다. 그 결성은 1919년 4월 6일 오전 9시에 대구부청에서 대구부윤 나카노[中野], 중추원 찬의 박중양, 참여관 신석린(申錫麟), 달성군수 등 72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포의 불령선인(不逞鮮人)에 선동되지 않도록 함에 있다.’를 목적으로 내세우며 이루어졌다. ‘자제회’, ‘자성단’, ‘자위단’ 등 제각각의 이름을 가진 친인반민족 단체인 자제단이 대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대구 자제단은 박중양을 단장으로 선출하고, 취지서와 규약을 채택하였다. 자제단은 3·1운동을 ‘폭거’로, 운동 참가자를 ‘흉도’로 규정하였다. 결국, 자제단은 3·1운동을 방해하는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혜성처럼 나나탄 비밀결사 혜성단]
1919년 4월 17일에 계성학교의 김수길(金壽吉)·허성도(許聖徒)·이명건(李命健)[이여성] 등과 목사 최재화(崔載華) 등이 비밀결사 혜성단(慧星團)을 조직하고,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을 지구전적으로 전개하고자 하였다. 혜성단은 대구에 본부를 두고, 서울, 상주 등 각지에 지부를 설치할 계획이었다.
혜성단이 결성되기 전인 1919년 4월 초 일본인과 금전 및 상품 거래를 금지하는 내용의 격문 「동정표시 경고문 제1호」를 시내 곳곳에 살포하는 것이었다. 이어 1919년 4월 13일 자제단의 박중양과 구장 백응훈에게 ‘암살’을 경고하는 내용의 격문을 보냈다. 비밀결사 혜성단은 「근고 동포」, 「경아 동포」, 「관공리 동포」, 「경고 관리 동포」 등의 다양한 격문을 만들어 대구 곳곳의 장소와 도내 한국인 군수, 면장, 군과 면의 서기, 한국인 상인 등에게 배포하였다. 격문이 내용은 ‘독립운동 참여 촉구’, ‘폐점 투쟁’, ‘일본화폐 배척’ 등을 담고 있었다. 혜성단은 3·1운동을 격문 운동으로 확대하였다.
1919년 5월 중순 김수길이 일제 관헌에게 검거되는 것을 계기로 대부분의 단원이 검거되었다. 1919년 7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 7호 위반, 협박 및 사문서 위조행사 등의 혐의로 김수길은 징역 2년 6월, 이영옥·이명건·허성도·이기명·이종헌·최재화·이수건·이덕생 등은 각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김수길·이종식·이영옥·이명건[이여성] 등은 대구복심법원 판결에서 원심판결을 취소한 일제의 사법당국에 의하여 오히려 형량이 높아져 김수길 징역 4년, 이종식·이영옥·이명건 등은 징역 2년 6월의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재건 달성친목회의 만세 운동 지원]
1910년대 대구의 재건 달성친목회는 한국의 독립에 대한 전망을 가지면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주목하였다. 서상일은 안곽·이형재·김기성·남형우·변상태·신상태·김응섭·김재열·배중세·이순상 등과 함께 모여 조선 남부를 중심으로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경남의 서상환·서상호와 대구·경북의 서창규·배상연·배상렴·편동현 등과도 중국 상하이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로 결의하였다. 먼저, 1919년 음 2월 말 혹은 3월 초경 대구의 자산가인 정용기(鄭龍基)를 만나 운동자금 지원을 요구하였다. 다음으로 경남 지역 자산가를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나섰다. 또한 1919년 4월 15일 서상일은 만주의 대한독립의군부에서 운동 자금 모집책으로 국내에 파견된 정운해(鄭雲海)를 경남 통영의 서상호에게 보냈다. 또한 서상일은 신흥학우회 회원인 문상직(文相直)으로부터 전해 받은 상해 임시정부의 포고문 및 강령을 확산시키는 활동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