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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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鳳山洞 |
영어공식명칭 | Bongsan-dong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영권 |
[정의]
대구광역시 중구에 속하는 법정동.
[개설]
봉산동(鳳山洞)은 대구광역시 중구 법정동 57개 중 하나이다.
자연 마을로는 봉산문화거리, 아릇장승배기[아랫장승배기], 웃장승배기[윗장승배기], 자라바우마을 등이 있다. 봉산문화거리는 연귀산[58m] 동편을 따라 흐르던 대구천이 복개되어 형성된 자연 마을이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서 있었던 큰 장승을 기준으로 아래에 있는 마을을 ‘아릇장승배기’ 또는 ‘아랫장승배기’로, 위에 있는 마을을 ‘웃장승배기’ 또는 ‘윗장승배기’로 불렀다. 자라바우마을은 연귀산에 있는 거북바위를 말하며, 연귀산 주변에 위치하는 마을을 ‘자라바우마을’이라 했다.
[명칭 유래]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새인 봉황새가 날아와 앉았던 산이라고 한 데서 ‘봉산동(鳳山洞)’ 지명이 유래되었다. 즉, 신령스러운 산, 성스러운 산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봉산은 다른 이름으로 연귀산(連龜山), 월견산(月見山), 거북바위산, 자라바우산 등으로도 불렸다.
봉산은 제일중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작은 언덕으로 조선시대에는 대구의 진산으로 여겼다. 언덕 정상부에 고인돌 덮개석으로 만든 거북바위가 있다. 고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구읍지(大丘邑誌)』 등의 기록에 의하면 대구의 끊어진 지맥을 잇기 위하여 거북바위를 머리는 남쪽으로 꼬리는 북쪽으로 향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연귀산(連龜山)이라 한다고 하였다. 구암서원(龜巖書院)의 전신인 구암사와 석빙고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조선 순종 때, 오시(午時)에 포를 쏘던 산이라 하여 오포산(午砲山)으로도 불렸다.
[형성 및 변천]
봉산동은 과거 대구부 동상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동성리 일부와 함께 경상북도 대구부 동상면 봉산정(鳳山町)으로 개설되었다. 1947년 일제 잔재 청산 일환으로 봉산정을 봉산동으로 변경하였다. 1949년에는 대구시의 시 승격으로 경상북도 대구시 봉산동이 되었다. 1963년에는 구제(區制) 실시로 경상북도 대구시 중구 봉산동이 되었다. 1970년 7월 봉산1구동과 봉산2구동으로 나뉘어졌다. 1975년 10월 봉산동으로 다시 통합되었다. 1975년 10월 봉산동 일부가 남구로 편입되었다. 행정구역 명칭 변경에 따라 1981년 대구직할시 중구 봉산동, 1995년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이 되었다. 봉산동은 법정동이고 행정동은 성내1동이다.
[자연환경]
대구분지 한가운데 위치하는 중구의 특성상 도시화 이전부터 평지였다. 분지 한가운데를 남에서 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신천 범람의 영향을 받아 도시화 이전에는 신천의 분류로 인한 습지가 곳곳에 발달하였다.
[현황]
봉산동은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덕산동·동성로3가·삼덕동1가·삼덕동2가·대봉동·대봉2동·남산동 등지와 경계를 이룬다. 서쪽은 남산동을 거쳐 중구 중심 도로인 중앙대로와 대구도시철도 1호선[대구도시철도 1호선과 대구도시철도 2호선 환승역인 반월당역]이 통과한다. 북쪽은 봉산동 구역을 양분하면서 대구 동서 최대 간선도로인 달구벌대로와 대구도시철도 2호선[대구도시철도 1호선과 대구도시철도 2호선 환승역인 반월당역]이 관통한다. 동쪽은 봉산육거리로 이어지는 이천로와 대봉로가 통과하며, 남쪽은 명륜로가 중앙대로와 동덕로로 이어지고 있어 접근성이 좋다.
주요 공공시설로는 대구초등학교, 경북대사대부설초등학교, 제일중학교, 봉산문화회관, 대구 중구문화원 등이 있다. 또한 봉산문화거리가 조성되어 있어 약 20여 개의 화랑이 모여 있다. 구역 남쪽의 봉산가구거리와 구역 북쪽의 야시골목 또한 유명하다. 야시골목에서 ‘야시’는 경상도 사투리지만, 표준말로 여우다. 삼덕동과 봉산동 사이에 위치하는 골목으로 대구 최고 번화가인 동성로와 이어진다. 동성로 통신골목 중간쯤인 동성로1길·동성로2길이 만나는 곳에서 동성로2길·동성로5길이 만나는 곳까지를 일컫는다. 개성 넘치는 작은 옷가게들이 즐비해 젊은 아가씨들이 많이 찾는다 하여 야시골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