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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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이칭/별칭 | 고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박성현 |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 고려왕조 시기 대구광역시 지역의 역사.
[후삼국시대]
후삼국시대는 889년(진성여왕 3)의 이른바 ‘도적 봉기’에서부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삼국시대 무렵 신라의 지방 지배 체제가 이미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고, 각지에서 도적이 그야말로 벌 떼처럼 일어났다고 한다. 이에 각지에서 자위적인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대구 지역에서도 여러 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들이 나타났다. 예컨대, 최치원의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따르면 이재(異才)라는 인물이 호국성을 쌓아 지키면서 대구 지역을 편안하게 하였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구도호부 성씨조, 경산현 고적조에 인용된 『주관육익(周官六翼)』에는 수성(壽城)에 수대성(壽大城)[일명 양성(壤城)], 구구성(句具城), 잉조이성(仍助伊城), 경산에 고포성(古浦城), 금성(金城), 우곡성(于谷城)이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대체로 이 시기에 분립한 성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성들을 중심으로 자위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후백제(900)와 후고구려(901)가 국가체제를 갖춘 뒤 각지의 독자적인 세력은 점차 양국에 포섭되었다. 양국이 본격적으로 영남 지역에 진출한 것은 왕건의 고려 건국(918) 이후로 보인다. 후백제는 대야성(大耶城)[합천]을 몇 차례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등 서쪽에서부터 영남의 서부 지역을 점거하였고, 고려는 북쪽에서부터 죽령로를 따라 성주(城主)들의 귀부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양국은 924년과 925년에 조물성(曹物城), 즉 현재의 의성 지역에서 충돌하게 되었다.
그 뒤 양국은 잠시 화친하였지만, 화친이 깨지고 영남 지역에서 수세에 몰리게 된 후백제는 927년 고울부(高鬱府)[영천]를 통하여 신라 왕경을 기습 공격하였다. 신라가 고려에 도움을 요청하자 고려는 급히 구원군을 파견하였고, 왕경을 약탈하고 회군하는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바로 공산(公山)[팔공산]전투이다. 공산전투의 패배로 고려는 영남 지역에서 수세에 몰리게 되지만, 930년 고창(古昌)[안동]전투에서 승리하여 다시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935년 후백제의 내분과 신라의 항복으로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현재 대구 지역에는 공산전투와 관련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무태·연경·나팔고개·살내[箭灘]·왕산·파군재·독좌암·해안·시량이[실왕리]·반야월·안심 등이 공산전투와 관련된 지명이라고 하며, 왕건을 대신하여 죽은 신숭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된 지묘사(智妙寺) 자리에는 조선시대에 표충사(表忠祠)가 세워졌다.
[행정구역 편제]
고려 태조 23년(940) 3월에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이름을 고침으로써 고려식 지명이 시작되었다.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대구 지역의 군현은 동쪽은 경주(慶州), 서쪽은 경산부(京山府)에 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 반영되어 있는데, 장산군·수성군·해안현 등은 경주의 속현이었고, 팔거현·대구현·화원현·하빈현 등은 경산부의 속현이었다. 그리고 현풍현은 밀성군(密城郡)의 속현이었다.
고려 중기에 들어 지방관이 파견되었는데, 1143년(인종 21) 대구현에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이때 화원현·하빈현이 대구에 소속된 듯하다. 팔거현은 조선 중기까지 성주에 속하여 있다가 칠곡도호부가 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수성에 감무(監務)를 두고 해안을 겸임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1394년(태조 3) 감무를 혁파하고 대구에 소속시켰으며, 1세(世)를 지나서 도로 경주에 붙였다가 1414년(태종 14)에 다시 대구에 붙였다.
장산군의 경우 1172년(명종 2)에 처음 감무를 두었고, 충선왕이 즉위하자 왕의 이름자[璋]를 피하여 ‘경산’으로 고쳤으며, 1317년(충숙왕 4)에 일연(一然)의 고향인 까닭에 지방관을 현령으로 승격시켰다. 이 밖에 특수 행정구역으로 자이소(資已所), 안심소(安心所), 구지산부곡(仇知山部曲) 등이 있었는데, 다른 속현들과 같이 주현에 파견된 지방관의 관할하에 있었다.
[팔공산과 비슬산의 불교 문화]
고려시대 팔공산의 대표적인 사찰은 동화사(桐華寺)와 부인사(符仁寺)이다. 동화사는 통일신라시대 진표의 손제자인 심지(心地)가 중창하여 유식 법상(唯識法相)의 가르침을 전한 사찰이다. 부인사는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판각한 초조(初雕)대장경판의 봉안처로 유명한데, 이 경판은 개경의 흥왕사 대장전(大藏殿)에 보관되다가 이곳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된 데에는 대각국사 의천의 화엄종 수제자인 무애지국사 계응(戒膺)이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계응은 말년에 주로 태백산 각화사(覺華寺)에 머물렀는데 부인사지에서 수집된 비편 중에 ‘무애지(無碍智)’가 있어 부인사와도 연관을 맺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부인사는 계응 이후 화엄종의 주요 사찰로서 대장경판의 봉안처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대구 지역에 속하여 있지는 않지만 팔공산 거조암(居祖庵)[영천 청통면]은 조계종[선종]에 속한 보조국사 지눌(知訥)[1158~1210]이 1190년 정혜사(定慧社) 결성을 주도하면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은 곳으로 유명하다. 또 두 세대 정도 늦게 태어난 선종 승려 보각국존[국사] 일연[1206~1289]은 대구 남쪽의 비슬산에서 주로 활동하였는데, 충렬왕이 즉위한 1274년에는 11년 동안 지내 오던 포산 인홍사를 중수하고 사액을 받아 인흥사(仁興寺)[달성군 화원읍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로 개명하였으며, 『삼국유사』에 앞서 「역대연표」를 작성하였다.
일연 이후 국존을 역임한 유가종[법상종] 출신 진홍국존 혜영(惠永)[1228~1294]은 비슬산 유가사(瑜伽寺)에 주석하였으며, 말년을 동화사에서 보내다 입적하였고 동화사에 탑과 탑비가 건립되었다. 그 뒤 같은 유가종 출신 자정국존 미수(彌授)[1240~1327]도 유가사와 동화사에 머문 적이 있다. 이처럼 팔공산과 비슬산은 고려 불교 교종과 선종 모두에 중요한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무신 집권기의 반란]
무신들이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무신 집권기[1170~1270]에는 지방에서 반란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대구 인근 지역에서는 1193년(명종 23) 운문(雲門)[청도 운문사]의 김사미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집정자였던 이의민은 반란을 진압하여야 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경주 출신으로 신라를 부흥시켜 왕이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내통하기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난은 진압되었고, 1196년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게 되었다.
경주, 운문 일대는 민란이 완전히 수습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최충헌 정권에 대한 반감이 심하였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경주를 중심으로 다시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1202년(신종 5) 10월 경주 별초군이 운문의 세력과 부인사, 동화사의 승려들을 끌어들여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영주 별초군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경주에서는 다시 신라 부흥을 내세우며 반란을 도모하였다. 최충헌은 진압을 위한 군대를 파견하였고, 반란은 지역적으로 확대되었다.
난은 1203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때 난에 참여한 흥주(興州)[영주]의 부석사(浮石寺)와 부인사(符仁寺) 등의 승도를 국문하고 섬으로 유배 보냈다고 한다. 부인사와 동화사의 승려들이 반란에 가담한 것은 기본적으로 무신 정권에 반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기존에 국가와 왕실의 후원을 받았던 교종 불교는 국왕을 옹호하고 무신 정권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 또 개경 중심의 고려 국가 체제에 대한 불만과 신라에 대한 향수를 주변 지역의 민들과 공유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외적의 침입과 항쟁]
고려시대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외적의 침입을 받았지만, 이 중 대구 지역에 영향을 미친 것은 1231년(고종 18)부터 1259년(고종 46)까지 약 30년에 걸친 몽골의 침입과 1350년(충정왕 2)부터 본격화하여 고려 말까지 지속된 왜구의 침입이었다. 몽골의 침입은 총 6차 11회[3차 3회, 6차 4회]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이 중 대구 지역에 영향을 미친 것은 2차, 3차 1·3회, 6차 1·2회라고 할 수 있다. 1232년 2차 침입에서는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었던 초조대장경판이 소실되었다.
3차 침입은 1235년부터 1239년까지 5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1235년[3차 1회] 내침한 몽골군의 일대가 안동, 해평 등지에 출현하였고 또 동경(東京)[현재의 경주]으로 진출을 도모하였다. 1238년[3차 3회]에 대거 침입한 몽골군은 윤4월 동경에서 황룡사탑을 불태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대구 지역의 주민들도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몽골의 6차 침입은 1254년부터 1259년까지 이루어졌다. 1254년[6차 1회]에는 차라다이의 몽골군이 충주를 거쳐 10월에는 상주산성을 공격하였으며, 그 뒤 단계(丹溪)[산청 신등면]를 경유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무렵 대구 지역도 공격을 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1255년 초에 포로가 되었던 대구 사람이 도망쳐 와 몽골군의 철수 소식을 알렸다. 몽골군이 철수하고 3월 산성과 해도에 입보(入保)한 자들을 나오라고 하였을 때 공산성(公山城)에 함께 들어가 있던 군현(郡縣)의 백성 중 굶어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아서 노약자들의 시신이 골짜기를 메웠으며 심지어는 아이를 나무에 묶어 두고 가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1255년의 6차 2회 공격에서도 대구 지역은 피해를 보았다. 1256년 4월 현풍현 사람들이 배를 타고 피난 가다가 인근 현(縣)의 강가에 정박하였는데, 몽골군이 추격하여 남녀와 재물을 빼앗고 권농사(勸農使) 김종서를 죽였다는 기사가 있다.
대구 지역이 왜구의 직접적인 피해지로 기록된 것은 1382년(우왕 8) 6월과 1383년 7월의 두 차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근 지역이 침입을 당하였을 때에도 같이 피해를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왜구는 미곡과 인민을 모두 노략하였기 때문에 주민들의 피해가 매우 심각하였다. 왜구로부터 어머니를 구하고 죽임을 당한 수성인 조희삼(曹希參)의 이야기는 이러한 실정을 잘 보여 준다.
이에 대하여 고려 정부는 외교적 교섭을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군사적으로 연해 지역과 일부 내륙 지역에 산성과 읍성을 축조하여 대응하였다. 산성은 몽골의 침입 때와 같이 인근 지역의 민들이 함께 들어가서 보호를 받는 형태로 활용되었다. 이 경우 평지의 생활 근거지가 파괴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점차 생활 공간 자체를 보호하는 읍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대구의 경우 팔공산성이나 대덕산성이 입보용 산성으로 활용되었을 것이고, 임진왜란 직전 본격적인 읍성이 축조되기에 앞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고려 말 조선 초에 달성토성이 ‘읍석성’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외침에 의하여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갖는 대구 지역의 여러 군현들이 점차 유명무실하여졌고, 대구현에 파견된 지방관을 중심으로 지역 사회가 재건되었다. 그 결과 대구 지역은 조선시대에 들어 대구현-대구군-대구도호부를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