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13
한자 文廟
이칭/별칭 대성전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명륜로 112[남산동 735-4]|북구 칠곡중앙대로 597[읍내동 600]|달성군 현풍읍 현풍동로20길 27-8[상리 326-1]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재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대구향교대성전 - 대구광역시 중구 명륜로 112[남산동 735-4]지도보기
현 소재지 칠곡향교대성전 -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중앙대로 597[읍내동 600]지도보기
현 소재지 현풍향교 대성전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현풍동로20길 27-8[상리 326-1]지도보기

[정의]

대구 지역에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한국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신 공간.

[개설]

대구 지역의 문묘(文廟)대구향교, 칠곡향교, 현풍향교 등에 있다.

조선시대 각 고을의 읍치 지역은 3단 1묘를 운영하였다. 문묘는 향교의 대성전을 이르는 것인데, 현재까지 잘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직단(社稷壇)·성황단(城隍壇)[초기에는 성황사(城隍祠)·여단(厲壇)]은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초창기에는 성균관이나 성주목에서는 공자 등 유교 성현들을 위패가 아니라 흙으로 빚어 만든 소상(塑像)을 모시기도 하였다. 성균관은 1530년(중종 25)에 이르러 소상을 철거하고 위패를 모셨다.

[건립 경위]

향교는 공자 등 유교의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성현의 가르침을 본받는 지방 교육기관이었다. 성균관의 축소판으로 이미 고려시대부터 각 고을에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향교의 제사 공간으로는 대성전(大成殿), 동무(東廡), 서무(西廡)가 있어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대성전, 동무, 서무의 세 건물을 합쳐 흔히 ‘문묘’라고 한다.

[위치]

대구향교는 관아 동쪽 2리인 교동에 있었으나 1932년 남산동으로 옮겼다. 칠곡부의 경우 1819년까지 관아는 가산산성에 있었으나 향교는 관아 남쪽 30리 위치의 교동[현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에 있었다. 현풍향교는 관아 북쪽 1리인 현풍읍 상리의 교동마을에 위치하여 있다.

[형태]

향교나 성균관에서는 존현(尊賢) 공간인 대성전 등 문묘가 교학(敎學) 공간인 명륜당보다 공간적으로 우위에 놓여 있다.

[현황]

조선 후기 대구부칠곡부의 향교는 중설위(中設位)로 39위를 제사지냈고, 현풍현 향교는 소설위(小設位)로서 27위를 제사지냈다. 광복 이후 성균관의 지시에 따라 전국 대부분의 향교에서는 대체로 25위를 모시고 있다. 즉,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五聖)을 모시고, 동무와 서무에는 각각 10현(十賢)씩 20현을 모신다.

중국의 5성은 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를 말하며, 20현은 중국 송(宋)의 정호와 주희를 비롯하여 신라 2명, 고려 2명, 조선의 14명이다.

[의의와 평가]

지금도 봄, 가을 두 차례, 시장·군수 및 유림들이 모여 문묘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내는 등 각 고을의 향교는 유교적 전통 문화를 유지하는데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석전대제는 공자를 비롯하여 신위를 모시고 있는 4성 10철 18현을 제사지내는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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