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0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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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2·7 救國鬪爭 |
이칭/별칭 | 2·7총파업,2·7폭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8년 2월 7일 - 2·7구국투쟁 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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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사회운동 |
관련 인물/단체 | 남조선노동당 대구시위원회 |
[정의]
1948년 대구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일으킨 파업 투쟁.
[역사적 배경]
2·7구국투쟁(二·七救國鬪爭)[일명 2·7총파업 또는 2·7폭동]은 1948년 1월 8일 유엔조선위원단이 유엔 감시 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통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하여 서울에 오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일으킨 파업 투쟁이다. 1948년 2월 5일 군정장관 아서 러취(Archer L. Lerch)가 미군 철수설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도 작용하였다.
[경과]
남조선노동당은 1948년 2월 ‘단선반대 구국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노동자의 파업을 주도하였다. 대구에서는 1948년 2월 7일 오전 5시 대학생들의 봉기를 시작으로 오전 9시 무렵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 대구전매국, 대구역, 대구우편국, 군시방적(郡是紡績) 대구공장 등 산업현장에서 동시에 파업이 발생하였다.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 대구지점에 30여 명의 청년이 트럭을 타고 들어와 ‘파업의 요구 조건’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살포하였고 이어 단독선거·단독정부에 반대하는 파업이 발생하였다. 그에 따라 남선전기주식회사 대구지점 관내 수전량(受電量)이 크게 줄어들어 송전이 중지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대구전매국에는 6명의 외부인이 들어와 “유엔조선위원단 반대와 단독정부는 일정 때의 착취와 같은 것이니 우리는 통일 정부를 원하며 미·소 양군 철퇴를 희망한다”라는 선언서를 낭독하고, ‘오늘부터 3일간 파업하자’며 구호를 외쳤다. 군시방적(郡是紡績) 대구공장에도 여성 1명과 남성 5명이 들어와 단독선거·단독정부에 반대하는 뜻을 표하였다.
한편 제5관구 경찰청[현 경상북도 경찰청]은 1948년 2월 7일 오전 10시 30분 대구경찰서 및 달성경찰서 서장, 특별경비대장 등이 참석한 비상회의를 연 뒤 도청 공안계에 경비총본부를 설치하고 모든 경관을 총동원하여 파업에 대비하였다. 2주 동안 전국에 걸쳐 진행된 2·7구국투쟁으로 서울, 부산, 대전, 순천, 안동 등지의 철도기관구에서 기관차가 파괴되었고, 전신·전파 케이블이 절단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과]
2·7구국투쟁은 미군정의 진압으로 실패하였고, 1948년 2월 26일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소총회는 남한 지역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결정하였다.
[의의와 평가]
2·7구국투쟁은 유엔 감시 하의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발생한 사건이다. 2·7구국투쟁은 사전 계획에 따라 진행된 투쟁으로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며, 미군정의 한반도 정책에 압박을 가하였다. 그러나 2·7구국투쟁은 한시적 파업투쟁이었기에 유엔 주도의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