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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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物産奬勵運動 |
영어공식명칭 | Korean Production Movement in Daegu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23년 대구 지역에서 전개된 경제 자립 운동.
[개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국적으로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났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은 일제 식민지 경제구조 아래에서 민족경제가 크게 위축되어 조선인의 경제생활에 위기가 닥친 상황에서 조선 민족의 경제자립을 위하여 일어난 운동으로, 1920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1923년 1월 9일에는 서울에서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1월 20일에 조선물산장려회가 창립되었다.
대구에서도 전국적으로 전개된 물산장려운동에 영향을 받아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났다.
[경과]
대구 물산장려운동은 1923년 2월 중순 대구청년회를 비롯한 조선불교청년회, 교남기독교청년회, 해성명도회(海星明道會), 여자기독청년회, 동아일보 대구지국 등 6개 단체가 개최한 ‘단연금주 물산장려 선전 연설 연합대회’를 도화선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연합대회에 자극을 받은 대구 시장정(市場町)[현 대신동] 총대 김광서(金光瑞) 등 5명이 단연회를 발기하고, 30명이 회원을 확보하였다. 이처럼 대구의 물산장려운동은 단연과 금주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동아일보 대구지국 특파원 윤영남은 “물산장려운동은 토산품 장려보다는 생산 증식에 있어야 하고, 그 주체는 중산층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생산증식론을 제기하였다. 대구노동공제회는 윤영남의 생산증식론에 대하여 중앙에서처럼 생산증식론을 특수자본가 계급의 이기적 형태로 간주하며 비판하였다. 이로써 대구에서도 생산증식론의 물산장려운동에 대한 논쟁이 빚어졌다.
[의의와 평가]
대구의 물산장려운동은 일제 식민지 경제구조에서 단연·금주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오랫동안 진행되지 못하였고, 일반 사회로까지 크게 확대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