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4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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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主統一民衆運動聯合 大邱慶北地部 |
이칭/별칭 | 민통련 경북지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1가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정원 |
설립 시기/일시 | 1985년 1월 31일 - 민주통일국민회의 경북지부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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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1985년 3월 29일 - 민주통일국민회의 경북지부에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구경북지부로 개편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6년 4월 5일 -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구경북지부 신민당과 민추협의 개헌현판식 주최 |
해체 시기/일시 | 1988년 -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구경북지부 해소 |
최초 설립지 |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
성격 | 민중민주운동단체 |
설립자 | 박병기 신부|류연창 목사 |
[정의]
1985년 대구광역시에서 결성된 민주화운동 단체.
[개설]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공헌한 재야인사들은 민주주의 실현과 민족 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재야 민주 통일운동 단체가 필요하다는 데 합의하고 1984년 10월 16일 민주통일국민회의(民主統一國民會議)[약칭 국민회의]를 창립하였다. 민주통일국민회의는 장기표, 백기완, 김병걸, 계훈제, 김태홍, 이호철 등 종교인, 변호사, 퇴직 언론인 등을 중심으로 결성되었고 의장은 문익환이었다.
대구·경상북도 지역에서도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수행할 운동 세력의 연대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설립 목적]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구경북지부는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열망하며 민주·통일운동을 전개하고자 결성되었다.
[변천]
1985년 1월 31일 민주통일국민회의 경북지부가 결성되었다. 민주통일국민회의 경북지부의 의장은 박병기 신부가 선임되었고 부의장은 류연창 목사와 류강하 신부가 선임되었다. 1985년 3월 29일 민주통일국민회의와 민중민주운동협의회가 통합하여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이 결성되면서 민주통일국민회의 경북지부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구경북지부(民主統一民衆運動聯合大邱慶北地部)로 개편되었다.
이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구경북지부는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후보 비판 지지 이후 활동을 잠정 중단한 후 대구경북민중연합이 결성되면서 조직을 해소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구경북지부는 기관지 『전진하는 민중』과 소식지 『대구의 소리』를 발간하여 시민들에게 민주화운동 참여와 개헌의 당위성을 홍보하였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구경북지부는 5·18민주화운동 진상 규명, 민주 헌법 쟁취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비롯하여 군부독재 반대운동과 개헌 추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86년 3월 3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과 재야인사들은 ‘군사독재 퇴진 촉구와 민주 헌법 쟁취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을 선언하였다. 신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는 1986년 3월 11일 ‘개헌추진위원회 서울지부 결성 대회’를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지역 지부 결성 대회와 개헌 현판식을 진행하였다. 서울, 부산, 광주 대회에 이어 1986년 4월 5일 대구의 아세아극장에서 개최된 신민당과 민추협의 개헌현판식 행사를 주최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구경북지부는 『대구의 소리』를 배포하고 2,000여 명이 벌인 연좌시위를 주도하였다. 경찰은 한일극장 등 대구 시내 일원에서 모두 141명을 연행하고 16명을 구속하였는데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구경북지부의 주요 간부가 구속되거나 수배 상태에 놓여 새로운 조직 구성에 나섰다. 이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구경북지부는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후보 비판 지지 이후 활동을 잠정 중단한 후 대구경북민중연합이 결성되면서 조직을 해소하였다.
[의의와 평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구경북지부는 1985년 2·12 총선 이후 분출하는 시민들의 민주화 열기를 집합시키고, 독재체제를 강고히 하려는 정부에 대한 민중적 저항운동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대구에서 개최된 신민당과 민추협의 개헌현판식 행사를 주최함으로써 군사독재 퇴진과 민주 헌법 개헌 요구를 전국화하는 데 일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