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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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生活運動 |
영어공식명칭 | New Life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4·19혁명 시기에 대구의 경북대학교 학생들의 생활계몽반과 신생활계몽대가 추진한 생활 개선 운동.
[설립 목적]
신생활운동은 4·19혁명 시기에 대구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과 문리대학 학생들이 자립경제를 확립하고 외제상품과 향략을 배격하는 것을 목적으로 생활계몽반과 신생활계몽대를 만들어 전개하였다.
[변천]
신생활운동은 이대악법반대운동과 통일운동이 고조되면서 약화되어 녹화사업 및 국토개발 사업 등으로 활동 방향이 바뀌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의 신생활운동은 자립경제 확립과 외제 상품 및 향락 배격 등을 방침으로 서울대학교의 ‘국민계몽대 신생활운동반’이 결성된 것에 영향을 받고 시작되었다. 대구의 신생활운동은 1960년 6월 15일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학생들이 생활계몽반을 결성하면서 시작되었다. 생활계몽반 학생들은 “양담배를 배격하자”, “정치혁명과 함께 생활을 개선하자”, “국산품을 애용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길거리 선전 활동을 통하여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1960년 10월 31일에 경북대학교 문리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신생활계몽대가 조직되어 신생활운동이 펼쳐졌다. 이때 첫째, 타락과 음모의 소굴 빠·카바레·다방의 문을 닫자, 둘째, 미국 과잉농산물에 농민은 운다, 셋째, 휘발유 낭비는 자립경제 좀먹는다, 넷째, 왜 가요 일소하여 민족정기 되살리자, 다섯째, 미제와 일제를 쓰는 것은 민족의 수치다 등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생활계몽반과 신생활계몽대는 계몽강연회를 개최하여 자립경제에 방해되는 사치와 허영을 일소하는 생활 개선 운동을 펼쳤다. 신생활계몽대는 1960년 11월 23일에 2개 반으로 나누어 시내의 다방에서 일본 음반을 압수하여 역전광장에서 소각하고, 무허가 카바레를 급습하여 사진을 촬영하거나 관할 경찰을 직무유기로 고발할 것도 고려하였다. 1960년 7·29선거 기간에는 선거 계몽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신생활운동은 이대악법반대투쟁과 통일운동이 고조되면서 점차 식어 녹화사업 및 국토개발 사업 등으로 활동 방향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