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497 |
---|---|
한자 | 權快福 |
영어공식명칭 | Kwon Kwaebo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921년 2월 2일 - 권쾌복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39년 - 권쾌복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백의단 결성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41년 2월 15일 - 권쾌복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다혁당 결성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41년 8월 - 권쾌복 일제 경찰에게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11월 - 권쾌복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8월 - 권쾌복 광복 후 출소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3년 - 권쾌복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활동 시기/일시 | 1999년 9월 - 권쾌복 광복회 제13대 회장 선출 |
몰년 시기/일시 | 2009년 12월 19일 - 권쾌복 사망 |
출생지 | 시미동 - 경상북도 구미시 시미동 |
학교|수학지 | 대구사범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다혁당 당수|광복회 회장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권쾌복(權快福)[1921~2009]은 1921년 2월 2일 경상북도 구미시 시미동에서 권상근(權相瑾)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비밀결사 조직인 백의단(白衣團)과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활동 사항]
권쾌복은 어릴 때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로 이주하여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1939년 비밀결사 백의단 결성에 참여하였고, 1941년 2월 15일 김효식(金孝植)·배학보(裵鶴甫)·문홍의(文洪義)·서진구(徐鎭九) 등 15명과 함께 대봉동에 있던 유흥수(柳興洙)의 하숙집에 모여 비밀결사 다혁당을 조직하였다. 다혁당은 대구사범학교의 비밀결사 문예부 및 연구회 등을 확대 개편하여 민족의식 앙양과 독립을 위한 실력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당시 권쾌복은 당수로 선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부장 겸 음악부 책임을 맡았다. 이후 다혁당은 대구사범학교 내 민족 차별 철폐를 위한 활동을 펼쳤고, 졸업 후 교원 생활을 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 주고 독립정신을 환기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1941년 7월 말 대구사범학교 8기생으로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정현(鄭鉉)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가택 수색 과정에서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윤독회(輪讀會)[문예부의 전신]가 발간한 항일 문예지 『반딧불』이 발각되어 대구사범학교 내 비밀결사 조직이 드러났다. 그 결과 경찰의 수사가 확대되어 대구사범학교 내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백의단·윤독회·문예부·연구회·다혁당에서 활동한 교직원·학생·동문·학부형 등 3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권쾌복도 이때 체포되어 1942년 1월 예심에 회부되었고,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44년 3월 2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고,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출옥하였다. 권쾌복은 1999년 9월 광복회 제13대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2009년 12월 19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권쾌복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2021년 2월 권쾌복은 국가보훈처로부터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