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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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鼓頌 |
영어공식명칭 | Shin Gosong |
이칭/별칭 | 신찬(申贊),신고송(申孤松),신말찬(申末贊)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종헌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하다 월북한 희곡작가 겸 아동문학가.
[개설]
신고송(申鼓頌)[1907~?]은 1907년 6월 9일 지금의 울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신말찬(申末贊)으로, 신고송(申孤松)·신찬(申贊) 등으로도 불렸다. 1920년 언양공립보통학교[현 언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대구사범학교 2년제 특과에 입학하여 1928년 졸업하였다. 신고송은 대구사범학교 재학 시절인 1927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에 가입하였으며 동시와 아동문학 평론을 발표하였다. 1946년 월북하였다.
[활동 사항]
신고송은 1924년 잡지 『어린이』에 「밧브든 일주일간」이라는 일기문을 기고하였다. 1925년 『어린이』에 동시 「우체통」으로 입선하였다. 1926년 기쁨사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1927년 『어린이』에 아동극 「꾀바른 토끼」를 발표하였다. 1930년 이주홍·엄흥섭 등과 함께 소년 잡지 『무산소년』을 발행하였다.
신고송은 대구공립보통학교[현 대구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사상 불온을 이유로 청도 유천보통학교로 전출되었고, 1930년 교직을 떠났다. 11월 대구사범학교 시절 알고 지낸 이상춘(李相春)·이갑기(李甲基) 등과 함께 대구에서 극단 가두극장(街頭劇場)을 조직하였다. 1931년에는 소용수·이정구·전봉제·이원수·박을송·승응순·윤석중·최경화 등과 신흥아동예술연구회를 창립하였다.
신고송은 1932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며 극단 ‘메가폰’을 창립하였다. 1943년 12월 제2회 국민연극경연대회 참가작 「아름다운 고향」을 연출하였고, 1945년에는 「백마」·「목련화」·「거친 파도의 거리」를 연출하였다.
신고송은 1946년 월북하여 1947년 북조선문학동맹전문분과위원, 1951년 6월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 겸 연극동맹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51년 10월 국립극장 총장, 1958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과 조선친선협의회 위원장, 1959년 국립연극학교 교장과 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에 임명되었다. 1962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저술 및 작품]
신고송의 희곡으로는 「결실」[1945], 「철쇄는 끊어졌다」[1945], 「서울 갔든 아버지」[1946], 「3·1전후」[1947], 「최후의 날」[1948], 「불길」[1950], 「선구자」[1953] 등이 있다. 연극 평론으로는 「일본푸로극장동맹 제3회 전국대회 방청기」[1931], 「연극운동의 출발」[1931], 「슈프렛히콜-연극의 새로운 형식으로」[1932], 「국제연극운동의 전망」[1932], 「조선의 신극운동」[1932], 「연극운동과 그 조직」[1945], 「조선연극의 진로」[1945], 「민주연극의 체제수립을 위하여」[1946], 「연극에 있어서 형식주의 및 자연주의적 잔재와의 투쟁」[1952], 「희곡창작과 언어문제」[1952], 「극문학 발전을 위한 몇 가지 중심 문제」[1956], 「극문학의 일보 전진을 위하여」[1961] 등이 있다.
신고송은 연극 이론서 『소인극 하는 법』[1946], 『연극이란 무엇인가』[1956] 등과 희곡집 『선구자』[1958] 등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