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7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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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相淳 |
영어공식명칭 | O Sangsun |
이칭/별칭 | 선운(禪雲),공초(空超)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덕제 |
[정의]
한국전쟁 중 대구에서 활동한 시인.
[개설]
오상순(吳相淳)[1894~1963]은 1894년 8월 9일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선운(禪雲)·공초(空超) 등의 필명을 사용하였다. 「방랑의 마음」, 「혁명」, 「때때신」 등의 시를 저술하였다.
[활동 사항]
오상순은 1906년 양사동소학교[현 서울효제초등학교]와 1912년 경신학교[현 경신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18년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종교철학과를 졸업하고 1923년 보성고등보통학교[현 보성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오상순은 1920년 ‘폐허’ 동인에 가입하여 김억(金億)·남궁벽(南宮璧)·황석우(黃錫禹) 등과 교유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4년에는 범어사에 입산하여 공초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25년 사립보성고등보통학교[현 보성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재직하였다.
오상순은 기독교 신자로 전도사로 활동하였으나, 1930년 중앙학림[현 동국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것을 계기로 불교로 개종하였다.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오상순이 처음 대구에 온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경으로 추정된다. 남산동 일대에 머물면서 이장희, 이상화, 백기만, 김봉기 등과 어울렸다. 두 번째로 대구에 온 것은 1938년경인데 남성로에서 ‘아세아’라는 어묵집을 경영하였다. 광복 이후 상경하여 역경원, 조계사, 선학원 등에서 지내다가 한국전쟁 중 낙향하여 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염매시장 근처 ‘상주집’에 머물렀다.
오상순은 1963년 6월 3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오상순은 생전에 시집을 발간하지 않았는데, 유고 시집으로 『공초오상순시집(空超吳相淳詩集)』[1963]과 『방랑의 마음』[1977] 등이 있다. 오상순은 주로 『폐허』에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폐허』 창간호에 수필 「시대고와 그 희생」을, 『폐허』 2호[1921]에 「힘의 숭배」·「힘의 동경」·「힘의 비애」·「혁명」·「때때신」·「돌아!」·「가위쇠」 등 시 17편을 발표하였다. 또한 『폐허』에 평론 「종교와 예술」을 발표하였다. 『개벽(開闢)』[1920]에 「의문」·「어느 친구에게」·「나의 고통」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묘소]
오상순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북한산 빨래골에 있다.
[상훈과 추모]
오상순은 1956년 예술원상과 1962년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1963년 수유동 묘역에 시비 「방랑의 마음」이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