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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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柄學 |
영어공식명칭 | Lee Byeongha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이병학(李柄學)[1862~1942]은 1862년 10월 17일에 태어났다. 대구에서 기업인으로 활동하며 대구교풍회(大邱矯風會)·자제단(自制團)에 참여하고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등 친일반민족 행위를 하였다.
[가계]
이병학의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아버지는 이경상(李慶祥), 어머니 서선자(徐仙子)이다.
[활동 사항]
이병학은 1901년 8월 하급 관료인 통신원 전화과 주사를 한 달 정도 지냈다. 1906년 6월 대구농공은행이 설립될 때 주주로 참여하였고, 1907년 8월부터 9월까지 한 달간 대구수형조합소 평의원을 지냈다. 1908년 12월에는 대한협회 대구지회의 회원이 되었다. 이석진(李錫珍)의 뒤를 이어 경상농공은행이 1918년 10월 조선식산은행이 될 때까지 은행장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의 상담역이 되었다. 1910년대 말 일본인 중심의 대구상업회의소에서 부회장을 맡았다.
이병학은 1913년 선남은행(鮮南銀行)에 260주를 출자하여 이사가 되었으나, 1923년 무렵 주식을 처분하고 이사직에서 물러났다. 1913년 대구은행 설립에 참여하였고, 10만원을 출자하여 2,050주의 주식을 보유하였다. 대구은행이 경남은행과 합병하여 경상합동은행(慶尙合同銀行)으로 변경될 때 1,633주를 출자하였고, 경일은행에도 자본을 투자하였다.
1917년 조선총독부는 민풍을 개량한다는 명목 아래 교풍회(矯風會)를 조직하였고, 대구에서는 10월 무렵 대구경찰서 주도로 대구 교풍회가 조직되었다. 이때 이병학은 회원으로 참여하였고, 1919년에는 3·1운동을 방해하기 위하여 결성된 자제단의 발기인이 되었다. 1910년대 말 대구부가 추진한 대구빈민구제회(大邱貧民救濟會)에 회원으로 참여하였고, 1918년 2년 임기의 대구부협의회 의원이 되었다. 1921년 4월에는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참의가 되었다.
이병학은 은행 외에도 대흥전기주식회사(大興電氣株式會社)·조선물산무역주식회사·고려요업주식회사·대동사(大東社) 등 여러 회사에 자본을 투자하였다. 1919년 대구주조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하여 주류업에 종사하였으나, 1923년 무렵부터 경영 악화로 인하여 사실상 휴업 상태에 빠졌다. 이병학은 호전농구·동양축산주식회사·경성현주시장 등의 감사로도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