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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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矯風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조선인 자본가들로 결성된 친일 단체.
[개설]
조선총독부는 민풍(民風)을 개량한다는 명목하에 친일 지주, 지역 유지, 금융 자본가, 부·도·군협의회 회원 등을 구성원으로 하여 교풍회(矯風會)를 설립하였다. 1911년 마산 교풍회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교풍회가 설립되기 시작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더 증가하였다. 대구 교풍회(大邱矯風會)는 1917년 10월 대구경찰서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대구 교풍회의 고문은 부윤(府尹), 경무부장, 참여관 등으로 구성하였고 회장을 비롯한 임원은 조선인들이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17년 10월 결성 당시 대구 교풍회 회원은 80여 명이었다. 회장으로 서경순(徐耕淳), 부회장으로 서병규(徐丙奎)와 정해붕(鄭海鵬)이 선정되었다. 회원은 정재학(鄭在學), 서병오(徐丙五), 이병학(李柄學), 이장우(李章雨), 서기하(徐基夏), 진희규(秦喜葵), 서병조(徐丙朝), 김응섭, 서상춘, 정석규, 장상철 등으로 대부분 금융 자본가이거나 대구 지역 유지였다. 교풍회는 민풍을 개량한다는 명목하에 설립하였지만 실제로는 농민 통제와 농촌 치안을 위한 단체였다. 회원은 20세 이상 50세 이하의 남자로 구성되었는데 회원들이 조를 이루어 경찰서 관내에서 치안 업무를 보조하기도 하였다. 1918년 2월 대구 교풍회는 대구부민(大邱府民) 가운데 효(孝), 성(誠), 미(美), 선(善) 등 4개 분야로 선발하여 회원에게 표창하였다. 최현달, 김찬수, 서병조, 서병원, 도남이 등이 수상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대구를 비롯한 경상북도 각 지역으로 3·1운동이 확산되자 일제는 3·1운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대구 교풍회 회원들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전개된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계기로 경상북도 각 지역으로 3·1운동이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자제단(自制團)을 조직하였다. 이때 대구 자제단에 참가한 인물은 박중양, 이병학, 이장우, 정해붕, 이일우, 이영면, 정재학, 한익동, 김홍조, 서철규, 서병원 등이었는데 대부분 대구 교풍회 회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