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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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海鵬 |
영어공식명칭 | Jung Haebu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친일 자본가.
[개설]
정해붕(鄭海鵬)[1871~1950]은 1871년 11월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관료를 지냈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제인으로 활동하여 자제단 결성에 참여하고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등 친일반민족 행보를 이어 갔다.
[가계]
정해붕의 아버지는 정재은(鄭在殷)이고, 어머니는 현정인(玄貞仁)이다.
[활동 사항]
정해붕은 1901년 11월부터 1903년 4월까지 약 2년 동안 금광 관리와 세금 징수를 담당하는 내장원 소속의 경상북도 금광위원을 역임하였다. 내장원은 전국 광산을 관리하기 위하여 각 도에 각광감리(各鑛監理)와 광무위원(鑛務委員)을 파견하였다. 1902년 8월부터 약 한 달 동안 경상북도관찰부 주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1903년 12월 탁지부 징세 주사가 되었다.
정해붕은 1906년 6월 대구농공은행의 주주로 참여하였고, 1908년 진주농공은행 합병되어 설립된 경상농공은행에도 주주로 참여하였다. 또한 1908년 8월 대구금융조합 설립위원, 9월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위원, 11월 공립대구보통학교 학무위원과 대구지방위원을 역임하고 조선농회 경북지회에도 참여하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대구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의 서기로 활동하였고, 1909년 3월 대한협회 대구지회의 평의원이 되었다.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정해붕은 일본인 오쿠라 다케노스케키[小倉武之助]가 주도하여 설립한 대구전기회사에서 중역으로도 활동하였다. 1914년부터 1923년까지 대구부협의회 의원을 지냈고, 1921년 1월부터 1924년 3월까지 대구학교평의회의 1기 회원이 되었다. 1917년 대구 교풍회의 부회장으로도 활동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자 이를 방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자제단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정해붕은 1923년에 대구은행의 주식 400주를 매입하였고, 1925년 주식 규모를 2,100주로 대거 늘리면서 이사로 발탁되었다. 1928년 경상합동은행(慶尙合同銀行)의 설립위원장이 되어 창립대회에서 경과보고를 진행하였고, 이후 2,325주를 소유한 대주주로서 이사에 선임되었다. 1931년에는 영천군 금호면[현 영천시 금호읍]의 금호수리조합에 관여하였다. 1940년 8월 3일 중추원 참의가 되었고, 전시체제기인 1941년에 대구일일신문사의 감사를 역임하였다. 1941년 12월 7일 대구 욱정공립국민학교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결성식에서 상임이사로 선출되었으며, 1942년 경상북도양곡주식회사의 이사가 되어 경제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해붕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한 이후 은둔하다가 대구에서 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나자 참여하여 1947년 1월 대구문리과대학에 현금 680만 원과 토지 23만 6721평을 기증하여 최고 다액 기부자가 되었다.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공포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조사기관에 속속 체포될 때 정해붕도 1949년 3월 11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에 의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해체되어 풀려났다. 정해붕은 1950년 5월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