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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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敬植 |
영어공식명칭 | Park Kyungsi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박경식(朴敬植)[1909~?]은 1909년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성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보통학교[현 대구초등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일우동맹(一友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박경식은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1928년 4월 30일 결성된 학생 비밀결사 일우동맹(一友同盟)[일명 일우당]이 5월 12일 임시총회를 개최할 때 맹원으로 가입하였다. 박경식은 손익기(孫益基)를 책임으로 하는 제1그룹에서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의 박명근(朴命根)·박태식(朴泰植)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일우동맹은 1928년에 졸업한 윤장혁 등과 김성칠 등의 적우동맹(赤友同盟) 구성원을 배제하고 만든 비밀결사였다. 일우동맹은 ‘맑스주의적 혁명 전술의 함양’과 ‘학생운동을 실천적으로 행한다’라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1928년 3월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사가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폄하하는 발언을 하자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생들은 학생 자치, 희생자의 복교(復校), 일본인 교사 파면, 교장 실책 인정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 투쟁을 전개하였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동맹휴학 투쟁으로 인하여 대구 지역 학생 비밀결사 조직이 발각되어 박경식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일제 경찰 당국은 9명의 전담 수사 인력을 두고 40일간 총 105명을 체포하여 1928년 12월 11일 26명을 검찰에 송치하였다. 박경식은 1929년 10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단기 3년 장기 5년형을 언도받았고, 검사의 항소 포기로 1929년 10월 26일 석방되었다.